이탈리아의 천재음악가 로시니
로시니는 베토벤보다 22년을 어리게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음악가였으므로, 로시니는 어릴적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로시니의 천재성은 그가 열두살에 이미 현악 4중주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고, 열 네살에 오페라를 쓴 것을 보면 잘 알수가 있다. 그는 15세때 부터 정식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나, 수업시간에 배우는것보다 혼자서 고전파 선배들의 음악을 연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의 성공가도는 1810년 베네치아에서의 <결혼어음>이라는 오페라를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이후로 북부의 많은 극장들이 로시니에게 음악주문을 하였고, 로시니는 이를 소화해 내면서 자신의 기반을 세워 나갔다.
짧은 시간내에 음악을 완성하는동안 많은 실수가 생겼지만, 로시니의 낙천적 성격은 이를 무마했다. 그가 주장했던 그의 작업프로세스는 총 6주인데 이중 4주는 실컷 놀면서 아이디어를 내고 나머지 2주동안 모든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오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대중이 듣기좋고 아름다워 인기가 있었으며, 곧 전국적으로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20대 초반 그는 작곡가뿐 아니라 지휘자, 극장장으로도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탄크레디>,<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자>, <세빌랴의 이발사>등을 발표하며 일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초기 로시니의 작품은 고전파 음악의 형식인 소나타 형식을 따랐으나 점차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리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던 '콜로라투라(coloratura)-소프라노 가수가 빠르고 구슬을 굴리는 듯한 발성을 이용하여 매우 기교적으로 노래하는 창법. 음역이 높은 경우가 많아 가장 화려하게 들리는 성악 가창법의 일종이며, 18~19세기 오페라, 특히 이탈리아 아리아에서 많이 쓰임'를 없애는 것을 시도했고, 큰 장면 중심으로 이야기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지어지도록 했다.
1829년 로시니 프랑스에서 연금과 보수를 받으며 <빌헬름 텔>을 작곡하여 무대에 올랐으나,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로인해 로시니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빌헬름텔 서곡>
-빌헬름텔 서곡은 크게 4파트로 나누어 진다. 도입부는 저음현악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로 시작되며 이는 '스위스의 해돋이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2부는 제 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작은 음들을 트레몰로처럼 연결하며 시작하며, 이어 짧은 음을 반복하는 목관들의 연주가 점점 굵어지고, 점차 많은 악기들이 참여하면서 큰 소리를 내게 된다. 곧 3부에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광경을 연출하는데 이는 목동과 새,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대화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다시 활기찬 분위기로 시작되는데 트럼펫이 사용된다. 여기에 호른과 팀파니가 합세하여 진격하는 군대의 힘찬 행진을 보여준다.-
로시니의 특징중 하나는 엄청난 유머감각이었는데, 어느 만찬회에 초대받고 돌아가는 길에 그 집 부인이 "또 오십시오"라고 하자, 곧바로 "지금이라도 괜찮나요?"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밀라노 시에서 많은 돈을 들여 로시니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한다는 말을 듣자, "나에게 많은 돈을 주면 자신이 매일 서 있어 줄 수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후에 빌헬름텔은 매우 유명하여 져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라로 인정받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로시니는 37세에 음악을 그만두고 은퇴하였다. 그에 대해 많은 후설이 있지만, 첫째로 그가 신경계 질환으로 인한 발작으로 더이상 음악을 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고, 둘째로 그가 이미 당시 많은 돈을 벌었으므로, 더이상 음악으로 돈을 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만년에 그는 그의 고향 볼로냐로 건너가 볼로냐 음악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무렵 그는 엄청난 미식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본인 스스로의 요리책을 내기까지 했다.
로시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큰 요인은 (물론 그의 천재성이 뒷바침 했음) 바로 시대적 분위기 였다. 당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한 사회적으로 암울한 분위기, 그리고 베토벤의 심각한 음악적 분위기는 이제 사람들로 하여금 지치게 했고, 좀 밝고 경쾌한 음악을 요구하였다. 만약 로시니의 음악이 베토벤처럼 무겁고 진지한 음악이었다면, 아마 지금만큼 유명해 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