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7일 수요일

바그너에 대하여 -1

바그너의 어린시절



바그너는 181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는데, 9형제중 막내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찰 서기였으나, 바그너가 태어난지 얼마지 않아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연극배우이자 가수, 시인, 그리고 화가였던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을 했는데, 그로 인해 바그너는 종합예술적인 안목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또한 바그너가 8세가 되던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바그너가 최초로 보았던 공연은 베버의 <마탄의 사수> 였다. 이 공연은 바그너로 하여금 지휘자가 되는 꿈을 갖게 한다. 바그너는 호프만과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열심히 읽고, 연극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로이발트>라는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바그너는 학교를 그만두고 음악을 배우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바인리히에게서 작곡이론을 배우기 시작했고 바로 다음해에 바로 교향곡을 작곡하여 발표하기 시작한다.




오페라를 탐닉하다

20세였던 1833년부터 6년간은 오페라 작가가 되기 위한 기량을 닦는 기간이었다. 아무리 멀다하더라도 오페라 공연이 있다고 한다면 언제든지 달려갔던 바그너 였다. 그의 형이 있었던 뷔르츠부르크 시립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단 지휘자로 공연을 하였고, <요정>, <사랑의 금지>, <리엔치> 등의 오페라를 작곡한다.

1836년 자신의 오페라에 출연한 여배우 미나 플라너와 결혼하고 이후 3년후 약 3년간 파리에서 머물게 된다.  프랑스에서의 공연이 순조롭지 못하게 됨에 따라 바그너는 궁여지책으로 소설을 집필하여 출간하게 되는데 <베토벤 순례>라는 책이었고, 생각외로 성공을 거두어서 인지 그는 그 이후로 작가로써 인정을 받았고 오페라 대본을 직접 쓰기시작한다.

또한 파리는 당대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많은 예술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당대 유행했던 낭만주의를 접하게 되고 또 심취하게 된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 중에 바그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피아니스트 '리스트' 였다. 

이후 독일로 돌아온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리엔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등을 공연하였고 어릴적부터 꿈이었던 드레스덴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곧 그는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쫓겨나게 된다.



A performance of Wagner’s 'Lohengrin’ at the Munich Nationaltheater, circa 1860 Photo: Alamy
(바그너의 뮌헨 국립극장에서의 '로엔그린' 오페라공연 모습)


혁명과 도피생활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2월혁명의 영향으로 순수 독일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혁명이 일어났는데 바로 '드레스덴 혁명' 이었다. 바그너는 평소 독일인이 민족적으로 우월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이러한 그의 정치적 사상이 그를 혁명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물론 혁명은 실패했고 독일 연방정부는 바그너에게 체포영장을 내렸다. 그는 이 사건으로 스위스 취리히로 도피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훗날 아리아 우월주의로 시작된 나치당과 결탁하고, 유대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무리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스위스에서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고 그는 자주 전당포에 시계를 맡겼다고 전해진다. 1849년부터 1858년까지 그는 오페라 창작과 음악이론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이 <니벨룽겐의 반지>, <라인의 황금>,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오페라였다.


<라인의 황금>



<트리스탄과 이졸데>

또한 종합예술이론을 확립하는데 <미래의 예술작품> <오페라와 희곡> 과 같은 저서를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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