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9일 금요일
바그너에 대하여 - 3 (바람둥이 바그너)
2015년 5월 28일 목요일
바그너에 대하여 - 2 [바그너의 종합 예술론]
-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 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이어야 한다.
-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를테면, 조형예술, 시, 음악 등)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이들 예술이 모두 하나로 뭉쳐져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
-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며, 관현악은 그리스 비극에 있어서의 합창처럼 배경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일반적인 사상 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그리스도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인간 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다루되, 비극에 처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중심에 두었다.
-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해야 한다.
2015년 5월 27일 수요일
바그너에 대하여 -1
2015년 5월 18일 월요일
브람스에 대하여 (4) - 브람스의 죽음
NO. 04 | 2015.05.19 |
브람스의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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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에 뭍힌 브람스
평생 연정을 품었었던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의 죽음은 브람스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1896년 봄 자신의 63번째 생일날 그는 클라라의 뇌졸중 사망 소식을 접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된다. 이후 간암이 찾아오더니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건강은 결국 이듬해 향년 64세의 나이로 브람스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낭망주의의 드높은 물결속에서도 고전주의의 전통을 지켜내려는 그의 노력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의 죽음또한 크게 애도하였다. 그의 고향 함부르크에서는 모든 배들이 조기를 게양하였고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으며, 그의 주검은 모든 유명한 음악가들이 그러하였듯이, 비엔나에 뭍혔다.
그가 죽기전에 쓴 마지막 음악은 공교롭게도 죽음에 관한 명상을 다룬 음악이었다. 제목은 <네 개의 엄숙한 노래(Four Serious Songs)>로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한 가곡이다.
그는 그의 죽음을 직감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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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4일 목요일
[브람스(Brahms)에 대하여-3] 고전적 낭만주의의 길을 걷다
NO. 03 | 2015.05.14 |
브람스 (3) - 고전적 낭만주의의 길을 걷다 |
브람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고전주의가 점차적으로 쇄퇴하고 독일을 중심으로 낭만주의가 꿈틀거리던 시기였는데, 브람스는 낭만주의의 물결에 편승하지 않고, 오히려 고전주의를 굳게 지켜나가는 노선을 선택한다.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고전주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그의 두명의 스승중 첫째 스승인 코셀에게로 부터 바흐의 음악을 배움으로 바흐의 다성적 요소를, 둘째 스승인 마르크센으로 부터 베토벤의 고전적 형식을 이어받았다. 그로 인해 작곡가로 첫 발을 내 딛던 시기에 그는 베토벤에게 크게 심취하여 있었고 작곡된 음악들은 베토벤의 소나타 형식처럼 기승전결이 뚜렸한 음악이 되었다. 그것은 역동적인 전개, 뚜렷한 클라이막스, 그리고 긴장의 해소였다.
당대 활동했던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신경질 적이면서도 충동적이고 복잡하고 색다른 표현을 브람스의 음악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절도 있는 운동과 힘, 전체적 조화와 균형을 강조 하였다. 또한 소나타 형식의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의 구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1) 충실한 고전주의적 교육으로 인한 기본기가 탄탄하였다는 점. 2) 절제와 조화를 중시한 특유의 성실한 성격 이 아닐까? |
2015년 5월 13일 수요일
[브람스에 대하여-2] 스승의 아내 클라라에 대한 사랑
NO. 02 | 2015.05.13 |
브람스 - (2)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에 대한 연정 |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예전에 독일 마르크화에 찍힌 100마르크 화폐의 슈만의 아내 클라라
그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으며, 독일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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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조세핀 비크 슈만(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1819~1896). 바로 브람스의 스승인 슈만의 아내이다. 브람스에게 있어 클라라는 스승의 아내이자, 연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스승 슈만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본 브람스였지만, 브람스는 절대 클라라를 스승의 아내 이상으로 진전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이성으로 감정을 억눌렀으며, 죽을때까지, 그녀를 존경하며 지냈다.
1844년 4개월간의 러시아 음악연주여행을 마치고 심신이 심각히 손상된 슈만은 정신병으로 인해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고, 곧 2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일곱명의 자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슈만을 잃은 클라라...그녀를 바라보던 브람스는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이 단순한 연민이 아닌 사랑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자신을 통제한다. 그는 스스로 '저분은 나의 스승의 부인이므로 나는 그녀를 존경한다"라며 자신을 다스렸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와, 그의 스승의 죽음을 위해 작곡한 <독일 진혼곡>을 발표한 것도 어찌보면, 어머니를 위해서라기 보다, 그가 내면적으로 사랑했던 스승의 아내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한 곡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독일 진혼곡>의 경우 죽은 사람을 위한 곡이라기 보다, 살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곡이기 때문이다. 이후 약 40년 동안 클라라는 브람스와 우정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호칭은 '경애하는 부인', '나의 클라라라' '부인' 에서 '당신'에 이르기 까지 점차적으로 깊어갔지만, 그는 끝까지 우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점차 명성을 얻어가며 주변에 많은 여인들에게 인기를 얻어 갔지만, 브람스는 오히려 그런 상황을 귀찮게 여겼다. 하루는 브람스가 어느 파티장에 참석했는데, 그때도 여느때처럼 많은 여인들이 그를 둘러 쌌다. 이를 귀찮게 여긴 브람스는 평소에 잘 태우지도 않는 담배를 태우며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 냈다. 여인들을 쫓아내기 위함 이었다. 그러자 한 여인이 "선생님, 여기는 여자들도 많은데, 꼭 그렇게 담배를 태워야 되겠어요?"라고 하자 브람스는 "천사들이 있는데 구름이 없어서야 되겠소"라고 맞받아 쳤다고 한다. 그의 경쟁자 바그너와 비교하자면, 특히 연애관에 있어서 브람스는 순정파 중의 순정파라고 할 수 있다. 바그너는 죽을 때까지 수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설에 휩싸였었지만, 브람스는 끝까지 한 여인에 대한 순애보를 잃지 않았다. 그러한 브람스에 대한 태도를 후세인들은 "내면의 정열을 이성이라는 테두리로 굳혀서 걸어왔다"라는 표현으로 평가한다. 감정을 이성으로 다스리는 그의 태도는 고스란히 그의 음악세계에도 적용되는 듯 하다. |
2015년 5월 12일 화요일
[브람스에 대하여 - 1] - 가난한 음악천재 브람스 - 그의 일생을 바꾼 두번의 기회
NO. 01 | 2015.05.13 |
가난한 음악천재 브람스 - 그의 일생을 바꾼 두번의 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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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유년시절 183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브람스는, 함부르크 시립극장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던 아버지 요한 야콥 브람스와 아버지보다 일곱살이나 나이가 많은 성실한 성품의 어머니사이에 태어났다. 일찌기 브람스이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그의 아버지는 브람스를 코셀에게 맡겼는데, 코셀은 브람스의 실력이 자신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를 그의 스승인 마르크센에게 보낸다. 그로부터 3년뒤, 브람스가 15세가 되던 해에 드디어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가정형편이 너무나도 어려워서인지, 브람스는 온갖 힘든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일생을 바꾼 두 번의 기회 첫번째 기회 1853년 스무살의 브람스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와 함께 한 연주여행에서 요아힘(Joseph Joachim)을 만나게 되는데 요아힘은 브람스를 슈만과 그의 부인인 클라라에게 브람스를 소개하고 그들은 브람스의 후원자가 된다. 슈만은 1853년 10월자 <음악신보>에서 브람스의 뛰어난 음악성을 세상에 소개하고 당대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였던 클라라는 브람스의 피아노 작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게 된다. 그때 출판된 브람스의 음악은 피아노 소나타 Op.1, Op.5였다. |
2015년 5월 10일 일요일
브람스파 VS 바그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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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특징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사망으로 빈 중심의 고전주의가 쇠퇴하고 독일중심의 낭만주의 음악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거장들의 잇다른 죽음으로 그들의 뒤를 이은 또다른 거장의 등장에 대한 기대는 브람스와 바그너에게 쏠리기 시작하였다.
01 | 브람스(안정적 고전음악의 계승자) |
02 | 바그너(역동적 낭만주의의 계승자) | |
독일 함부르크(Hamburk) 태생의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는 서양음악의 3B (Bach, Beethoven, Brahmas)로 불릴정도로 명성이 드높은 음악가이다. 브람스는 전통주의자이며 혁신자 였는데, 그의 뿌리는 고전파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음악가들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할 정도로 화성과 음색에 대한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도를 통해 비록 고전주의에 뿌릴르 두고 있다 하더라도, 혁신적인 많은 곡들을 내 놓았다. 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의 브람스는 당대 소용돌이 치던 낭만주의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음악을 주창하였다. |
독일의 라이프치히(Leipzig)태생의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는 음악가일 뿐 아니라, 음악이론가, 수필가로써 당대 유행했던 낭만주의 사조를 섭렵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음악도 낭만주의 예술사조의 한 분야라고 인정하고 음악자체에 절대성을 두지 않았다. 즉 그의 사고는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고 불리운다. 그의 음악은 순수한 음악자체에 가치를 두기보다, 당대 사회적 흐름과 연관을 짓다 보니, 나치당의 국가주의적 음악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 |
성격 : 내성적이고 외골수 타입 |
| 성격 : 외향적이고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했던 야심가 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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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전통을 계승하여 베토벤 등의 선배 음악가들이 확립한 고전주의 음악을 이어가려 함. |
| 진보적이고 실험적이라 전통을 따르기 보다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는데 관심이 있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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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음악을 강조 감정의 표현을 절제하고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절대음악이야말로 참다운 음악이라고 주장함 |
| 표제음악을 강조 대담한 화성과 강렬한 감정표현, 그림을 보는 듯한 회화적 묘사슬 중시하는 표제음악을 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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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에 맞는 독립적 음악을 추구 (오로지 음악) |
| 장르를 뛰어넘어 종합예술적 음악을 추구 (음악, 미술, 문학을 통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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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파 지지자 슈만부부, 한스 폰 뷜로, 요아힘 |
| 바그너 지지자 리스트, 쇼펜하우어 |
2015년 5월 8일 금요일
피아노 연습곡에 대하여 - 쇼팽(Chopin)의 프렐류드(Prelude) vs 바흐(Bach)의 평균율(Prelude & Fugue)
쇼팽의 프렐류드(Prelude) vs 바흐의 평균율(Prelude and Fugue) |
낭만파 음악의 선구자인 쇼팽, 바로크 음악의 선구자인 바흐. 이 두 대가의 음악을 비교한다면?
쇼팽의 대표적 서정적 곡인 전주곡(Prelude)는 24개의 짤막한 곡들로 구성된 한편의 아름다운 시와 같은 곡이다. 너무 길어서 지루할 수 있는 교향곡과는 다르게 대부분 1~2분 사이면 끝이 나는 짤막한 곡들이지만, 저마다 다른 조로 이루어져 있어 저마다의 색깔과 맛을 지니고 있는 전주곡은 전 곡이 끝날때까지 지루한 맛이 전혀 없다. 24개 곡에는 표제가 없다. 그래서 지휘자 금난새 선생님은 대학시절 이 곡들에 저마다의 제목을 각각 붙여 보셨다고도 하니, 나도 시간날때 24개 표제를 한번 지어보아야 겠다.
아래 루빈스타인의 쇼팽 프렐류드 전곡을 듣다보면 아마 몇곡쯤은 귀에 아주 익은 곡들이 있을 것이다. 24개 곡중 한곡 정도는 능숙하게 연주할 정도로 연습을 해 본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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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피아노를 배울때 체르니를 마치면 일단 바흐로 넘어갔고, 바흐의 곡을 마치면 쇼팽으로 넘어갔다. 그 말은 그만큼 피아노계에 있어서 이 두사람은 예술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교육적으로도 뛰어난 교재가 될 만큼 음악계의 바이블이라고 할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바흐의 평균율 즉 클라비어곡집은 24개 장조와 단조로 쓴 전주곡 모음곡 2권으로 구성되는데 처음 이 곡이 작곡된 의도는 교육적 목적이었다고 한다. 피아노 학습자에게 있어서는 기본적인 책으로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작품 자체로 놓고 보았을때도 최고의 예술작품임에 틀림없다. 혹자는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가 신약성서라면, 바흐의 평균율은 구약성서라고 까지 칭하기도 한다.
바로크 시대에 피아노의 발명과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평균율은 12개의 건반에 자연 배열음을 각자 비율에 의해 동일하게 나눠 준다. 즉 자연 배열음의 음정비는 한 옥타브에서 1:2의 음정의 비율을 가지고 있다. 옥타브 단위로 그 옥타브를 12제곱근을 해서 얻은 각개의 건반을 일정한 평균의 비율을 이용하여 조율하기 때문에 이를 평균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평균율은 건반간의 간격이 똑 같기 때문에 어떤 화음으로도 어울리게 연주할 수 있고 어느 조로도 조바꿈이 가능하다. 평균율의 발견으로 바흐 이후 후세 모두가 현재까지 평균율 조율법을 사용하고 있다. 음악은 수학이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음악도 잘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일까? 바하의 평균율은 대부분 2~3분을 넘지 않는 곡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한번에 다 들어볼 만 하다. |
2015년 5월 7일 목요일
리스트에 대하여 (2) - 초절기교 피아노 연주가
체르니와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고, 파리에서는 쇼팽과 파가니니와 친했던 리스트. 그는 평생 음악가, 문필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고 주변인들은 리스트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의 음악세계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리스트의 피아노 기교는 파가니니의 영향을 받았는데, 파가니니의 엄청난 연주기교는 리스트의 피아노 기교에 대한 열정을 불사질렀다(한마디로 뽐뿌질을 한 것이다).
스스로 피아노계의 파가니니가 되겠노라 결심한 리스트는 <헝가리 광시곡 19곡>, <초절기교연습곡 12곡>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스스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교에 도전하는 음악가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기교를 요하는 리스트의 곡은 지금도 피아노 콩쿨이나 입시곡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리스트의 기교발전은 그의 연주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게 했는데, 자신의 연주를 듣는 태도가 좋지 못할때 그는 연주를 멈추곤 했다. 특히 러시아 황제 앞에서 연주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 궁전에서 연주할때, 니콜라우스 황제가 리스트의 연주를 듣던중 부관에게 작은 소리로 뭔가 지시를 하자, 리스트는 연주를 멈추었다. 깜짝 놀란 황제는 왜 연주를 멈추냐고 물었더니, 황제가 말씀하실때 누구나 침묵을 지켜야 하는 법도를 알고 있다며 되받아 쳤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 특히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드상드(George sand)와의 만남으로 낭만주의적 사고를 접한 리스트는 자신의 시적인 감성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어했고 결국 '교향시(Symphonic Poems)'라고 하는 새로운 음악장르를 창조한다.
말년에는 성직자로써도 활동했는데,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과의 결혼에 실패하면서 인생의 쓴맛을 본 리스트는 52세 나이인 1863년에 몬테 카를로의 마돈나 델 로사리오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이때부터 종교음악을 작곡하였다. 유명한 곡으로는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다>가 있다. 그는 카톨릭 주최의 많은 자선음악회에서 연주함으로써 교황의 신임을 얻어 바티칸으로 초청되고 3개의 성직을 받기도 했다. <몬테카를로> 점차 명성을 얻어간 리스트는 헝가리 왕실 고문으로도 임명됨으로써,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1886년 폐렴으로 세상을 따나기 불과 며칠전까지 연주를 하였던 걸로 봐서 그의 꽉 채워졌던 음악인생은 다른 많은 음악가들과 비교했을때 비교적 행복한 음악인생을 산 것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