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7일 월요일

쇼팽에 대하여-4 (피아노의 서정시인)

피아노의 서정시인 쇼팽



쇼팽만큼 피아노를 잘 알고, 피아노의 능력을 최대한 살린 음악가는 없을을 것이다. 그는 피아노로 표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섬세하고도 다양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는 피아노 소품곡을 많이 만들었는데, 야상곡(녹턴),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환상곡, 프렐류드, 왈츠 등이 그것이다. 물론 소품곡의 장르는 쇼팽이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쇼팽이 가장 아름답게 만들고 세상에 소개시킨 장본인이다. 쇼팽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장르도 있었으니, 바로 발라드 였다. 

쇼팽은 베토벤 처럼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음악에 담아내지는 않았다. 그는 음악은 감정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의 음악에서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느껴지기 보다 단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느껴질 뿐이다. 피아노로 시를 쓴 것이라고 보면 된다. 때문에 그는 '피아노의 시인' 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쇼팽 왈츠 No.7

▲쇼팽 야상곡

▲쇼팽 프렐류드

쇼팽에 대하여 - 3 (파리초연으로 유명세를 얻다)

파리 첫 공연으로 유명세를 얻다



쇼팽은 파리에서의 첫 공연을 통하여 유명인사가 되었다. 1832년 파리에서의 초연에는 피아노 제조업자인 플레이얼을 통해 열수 있었다. 그는 그가 만든 피아노를 널리 알려줄 유명한 연주자가 필요했다. 쇼팽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 플레이얼은 당장 쇼팽에게 공연을 부탁했다. 

파리의 귀족들과 멘델스존, 리슽, 슈만등이 그 공연에 참석했다. 다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곧 공연이 시작되자 청중들은 젊은 피아노 연주자 쇼팽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모두들 숨죽인 태도로 쇼팽의 마력이 빨려들어갔다. 연주가 마치자 모두 손바닥이 터지도록 큰 박수를 보냈다.

한번의 연주로 큰 성공을 거둔 쇼팽은 이후 귀족들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높은 수입을 거두게 되었다. 또한 많은 유명인사들과 예술가들과의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하이네, 들라크루아, 베를리오즈, 리스트, 파가니니 등이 그의 친구가 되었다. 

쇼팽의 유명세로 많은 이들이 그의 공연을 보기를 원했으나, 그의 수줍음 많은 성격으로 작은 규모의 살롱에서만 연주하였다. 때문에 그는 주로 귀족들과 유명인사들이 모이는 살롱에서 주로 연주하였다.


쇼팽에 대하여 - 2 (애국자 쇼팽)

쇼팽에 대하여 - 2 (애국자 쇼팽)




짧은 폴란드 역사

18세기 후반에 왕권의 강화와 국가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이 점진적으로 폴란드를 침입해 1795년 폴란드를 분할하여, 나폴레옹에 의한바르샤바 공국 시대(1807~1815) 외에는 1795년부터 1918년까지 3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의 맞서 1830년 독립을 위한 혁명 정부를 조직, 봉기로 이어졌으나 독립투쟁은 실패했다. 

외세를 몰아내고자 일으킨 혁명의 실패로 인해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에 분노한 쇼팽은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 오지 않았고, 러시아에서의 공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쇼팽은 늘 고국인 폴란드를 그리워 했다.

그가 어릴적 시골에서 들었던 폴란드 민속음악은 그에게 많은 향수를 자극하는 폴란드 민속음악풍의 작품들을 쏟아 내게 했다.






쇼팽에 대하여-1 (폴란드 태생 음악천재)

폴란드에서 태어난 음악천재 쇼팽 




'피아노의 시인' 이라는 별칭을 지닌 Frederic Francois Chopin (프레데릭 프랑수아 쇼팽)은 1810년 폴란드 바르샤바 인근 젤리조 바볼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대혁명때 불안한 정국에서 도피하여 폴란드에 정착한 프랑스 인이었다. 그곳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다가 폴란드 귀족출신인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를 만나 결혼하였고 1남 3녀를 두 었는데, 그중 쇼팽은 둘째였다. 

여느 음악천재들처럼 그도 어릴적부터 신동소리를 들었는데, 역시나 모차르트처럼, 4살때부터 피아노기초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열두살떄부터 바르샤바 음악학교 교장인 엘스너에게서 정식작곡교육을 받기 시작했다.(그는 쇼팽의 독창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그를 교육했다고 한다.)

열다섯살의 쇼팽은 처녀 작곡으로 '론도 작품1'을 세상에 내 놓았고 그의 천재성은 삽시간에 알려졌다. 그 결과로 당시 폴란드를 지배했던 러시아의 황제 앞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2015년 4월 23일 목요일

쇼팽과 리스트의 차이점

천재피아니스트 쇼팽과 리스트 차이점

 
   
01 | 음악의 서정시인 쇼팽
 
02 | 음악적 기교 테크니션 리스트
   


  • 쇼팽의 음악은 마치 시인이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쓰듯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섬세한 방법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자 애씀
  • 부끄러움이 많은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로 짝사랑했던 한 여인을 두고 고백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버림
  • 귀족이 많이 드나들던 살롱에서 주로 연주함
  • 40세 이전에 타계


 


  • 기교를 중시하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주법에 도전함
  • 활발하고 카리스마가 넘침
  • 수많은 여자들과의 스캔들을 유발함
  • 공개적 공연을 선호하였고, 톱스타로서 면모를 갖춤
  • 75세까지 장수를 누림





어쨋든 두사람다 한해 차이로 태어난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피아니스트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성격은 정 반대였음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Schubert-Unfinished Symphony/舒伯特-未完成的交响曲)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제8번 b단조. ‘미완성’이란 이름이 말해 주듯이 이 곡은 4개의 악장을 갖추어야 할 교향곡인데도 1, 2악장밖에는 완성되지 않았다. 즉 제3악장은 처음의 9절만이 오케스트라 모음악보로 남아 있고 제4악장은 전혀 쓰인 흔적이 없다. 1822년 슈베르트가 25세 때 작곡하기 시작한 것인데 왜 그것이 미완성인 채로 중단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제1악장(알레그로 모데라토 b단조 3/4박자, 소나타형식)과 제2악장(안단테 콘 모토 e장조 3/8박자, 소나타형식)만으로도 정리된 아름다움을 지녀 낭만파교향곡 중 걸작으로 꼽히며 슈베르트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다. 1865년 빈에서 초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완성교향곡 [Unvollendete Symphonie, 未完成交響曲] (두산백과) 

2015년 4월 14일 화요일

낭만파 음악에 관하여 (Romantic music/浪漫的音乐)

낭만파 음악에 관하여

대표적 작곡가
베버(Cael Maria von Weber, 1786~1826, Germany)
로시니,
슈베르트,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쇼팽,
슈만,
리스트,
바그너,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Italy)
브루크너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고전파 음악의 말기에서 근대 음악의 시작에 결쳐 성행하였고, 프랑스혁명에서 부터 19세기 말 제국주의적 경향이 짙었던시기까지의 음악적 사조라고 볼수 있겠다. 낭만파 음악의 바탕은 개인주의 사조인데, 이전까지 예술이 종교나 도덕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을 노래했던 것과는 반대로 예술가 개인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19세기의 한없이 불안한 사람들의 심리는 종교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하여 종교에 의한 구원을 바라게 하였고 특히 공상세계에 대한 동경이 강한 낭만주의자에게 있어서는 그 공상의 세계가 종교적 신비의 세계로 바뀌는 일까지 생겼다. 이와 같이 낭만파 음악은 공상이나 환상의 세계를 노래했고, 종교적 신비나 신앙의 세계도 음악으로 표현되었다.

개인주의적 경향과 함께 낭만파 음악의 바탕이 된 또 하나의 사조는 국민주의였다. 국민주의가 가장 강렬했던 나라는 독일인데, 그것은 나폴레옹의 압박에 대한 반항에서 일어났다. 즉, 나폴레옹의 세계 정복에 대한 반발에서 국민성에 눈을 뜨고 국민주의를 강화하게 된 것이다. 이 국민주의는 유럽 각국으로 확산되고, 특히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국민주의는 범스라브 민족 운동에 뿌리를 박은 강력한 것으로서, 그 음악은 전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패배로 프랑스에서도 새로운 국민음악 운동이 일어났다. 국민주의의 발전과 함께 세계 각국에는 국민음악이 새로 생겨나 화려한 음악의 꽃을 피웠다. 그 결과 각 나라에서는 모국어를 존중하게 되었으며 이는 낭만파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모국어로 쓴 문핳꽈 결합된 음악을 탄생시켰다.

여기에서 몇 가지 새로운 음악이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것으로서 가곡/오페라/교향시 등 표제음악을 손꼽을 수 있다.의 표제음악이란 음악이 음 자체의 결합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문학적이고 회화적인 내용 혹은 자연현상 등을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데 의미를 둔 음악을 뜻한다.

19세기 전반의 음악을 보면, 고전파 음악을 완성한 베토벤이 만년에 이르러 낭만파 음악에 가까운 곡을 만들어 낸 후에, 베버는 국민적인 가극, 슈베르트와 슈만은 선율이나 반주가 대단히 훌륭한 예술적 가곡, 멘델스존은 감정이 풍부한 음악, 쇼팽은 시정에 충만한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많은 명곡을 남겼다. 이들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개성이 있고 독창적인 음악이며, 자유롭고 밝은 감정이 념쳐 흐른다.

19세기 후반의 음악을 가리키는 것으로, 표제음악이나 교향시가 성행하게 되었으며, 대 피아니스트인 리스트가 베를리오즈의 뒤를 이어 크게 성공하였다. 가극은 한층 극적인 것으로 충실해져, 이탈리아에서는 로시니의 뒤를 이어 베르디와 푸치니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가극은 구노와 비제, 독일의 가극은 바그너가 악극을 만들어서 유명해졌다. 관현악은 베를리오즈가 대편성을 생각해 낸 뒤, 말러부르크너가 대규모의 교향곡을 만들었다. 또 브람스는 고전파 음악의 전통을 살려서 신고전파의 음악을 작곡하였고, 요한 슈트라우스는 왈츠를 확립하였다.

<요한슈트라우스 '아름다운도나우강'>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의 차이점(Absolute music & Program music/纯音乐和节目音乐)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의 차이점


절대음악
(Absolute music)

절대음악(absolute music)은 문학/미술 등 다른 분야와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 않고 음의 순수한 예술성만을 목표로 작곡된 음악을 일컫는 말이다. 성악곡은 원칙적으로 시를 바탕으로 작곡되기 떄문에 절대음악이 될 수 없다. 표제음악과 대립 개념의 절대음악은 근대 음악미학의 개념으로 창작 면과 감상 면에서 해석상 차이를 보일 때가 있다. 

예를들면 바흐의 '푸가'는 절대음악의 대표적 예이지만 표제음악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으며, 또 표제음악이라 하여도 작곡자가 줄거리처럼 붙인 설명문을 보지 않고 들으면 절대음악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양자는 음의 형식구성에 있어서는 작곡상의 여러 기법에 따라 서로 공통점을 가지게 되지만 형식의 내용에 있어서는 음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음 이외의 다른 요소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 C단조>,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번 F장조>하는 식으로 작품의 번호와 조성등으로만 표시한다.

요약: 다른 예술분야와 관련없이 순수한 음악적 예술성만을 목표로 작곡된 음악
표현형식: 음악형식, 번호, 음계

대표적 절대음악


▲ 바흐 <푸가 D단조>



▲브람스 <교향곡 1번 1악장>



표제음악
(Programme music)

표제음악(Programme music)은 곡의 내용을 설명/암시하는 표제로써 구체적 또는 추상적인 대상을 묘사하려는 음악으로 절대음악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묘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현상이나 현실음 등의 구체적인 것에서 부터 이야기의 줄거리/동작/심리현상/사상 등의 추상적인 것까지 가지각색이다. 물론 음에 의한 묘사는 한계가 있어 문학/회화/조각 등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단순한 사물의 모방이나 묘사로 끝나거나, 이야기의 줄거리를 좊는 것에만 급급하다면 빈곤한 묘사 음악이 될 염려가 있으며, 또한 듣는 쪽도 너무 표제에 사로잡히면 그 음악의 본질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표제음악은 비발디의<사계>,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처럼 구체적인 제목(표제)를 갖는다.

요약: 구체적 묘사의 대상, 즉 표제가 있는 음악
표현형식: 표제


대표적 절대음악



▲비발디 <사계>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2015년 4월 9일 목요일

Classic travel - 슈베르트(Shubert, 舒伯特)-4 (겨울나그네(winterreise, 冬季旅游))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슈베르트는 31살의 젊은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전부터 그간의 가난으로 인한 영양부족으로 병세가 시작된듯 하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직감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곧 친구들을 불러모아 슬픈 노래들을 불러 주었다고 하는데, 그 곡들이 바로 가곡집 겨울나그네 였다. 그는 그가 살아생전 그토록 존경하던 베토벤의 묘소 근처에 묻혔다.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Winterreise)

Classic travel - 멘델스존(Mendelssohn, 门德尔松) (4) - 지휘자의 길을 가다(go the way of the conductor, 去导体的方式)

▲지휘자 멘델스존 (Mendelssohn)

베를린에서 지휘자로 활동중이던 멘델스존. 베를린 음악협회 감독직을 지원했을때, 스승인 챌터의 뒤를 잇는 자리였으므로 합격이 당연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낙방하고 마는데...그 이유는 어이 없게도 그 자신이 유대인이었기 떄문임을 알고는 크게 낙심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라이프치히로 이동하게 된다. 라이프치히는 유대인에게 비교적 관대한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라이프치히의 전통있는 관현악단인 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게 되는데, 곧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라이프치히는 유럽음악의 중심도시로 발돋움하게 된다.

라이프치히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와 평생 좋은 관계로 지냈던 그의 누이 파니의 사망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상심한 나머지 곧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Fanny hensel

멘델스존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등의 숨겨진 곡들을 발견하여 대중들에게 소개함으로서 잊혀질 뻔 했던 대가들을 발굴해 내는 큰 공을 세웠다. 

2015년 4월 3일 금요일

classic travel - 슈베르트(4) (Schubert, 舒伯特) - 가곡의 왕(king of the song/歌之王)

가곡의 왕 슈베르트
(song of the king Schubert)
(舒伯特艺术歌曲之王)
▲슈베르트

슈베르트 음악을 대표하는 작품은 역시 가곡이다. 빌헬름 뮐러의 연작시에 곡을 붙인 <아름다운 물방앗간이 처녀>를 비롯하여 슈베르트는 일생동안 약 600여곡이 넘는 가곡을 작곡하였다. 그가 가곡의 왕이라 일컬어 지는 이유는 곡이 많아서 만이 아니라 가곡이라는 장르의 발전에 크게 일조한 것에서 비롯된다. 당시만해도 가곡은 아마추어 음유시인들에 의해 불려지든지 바로크 시대 다성음악의 형식에 따른 것이 전부였다. 그가 존경하였던 모차르트, 베토벤등의 아름다운 선율을 이어받고, 가사는 괴테, 실러, 하이네 등의 서정적 시인들의 작품을 그대로 받아낸 것이다. 슈르트를 시작으로 이어서 독일가곡은 크게 발전을 이루었다. 슈만, 브람스, 볼프, 슈트라우스로 이어지면서 가곡은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