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바흐를 세상에 알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다름아닌 멘델스존이다. 우연한 사건이긴 했지만, 평소 바흐에 관심이 많았던 멘델스존이 아니었다면, 바흐는 정말 역사속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었다.
어느날 멘델스존이 고기를 사러 푸줏간에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한 여자손님이 고기를 사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고기를 싸려는 포장지가 뭔가 이상하단 것을 발견했다. 곧바로 멘델스존은 경약하고 말았는데, 그 포장지가 다름아닌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작, 마태복음 예수 수난곡' 이었기 때문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흐는 세상에 알려져 대중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멘델스존 역시 유명한 지휘자로 명성을 얻는 계기 가 되었다.
슈베르트가 대중에게 잠시 알려진 적이 있었는데, 쉽게 얘기하면 당시 대중적인 스타가수였던 미하엘 포글 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였다. 포글은 당대 오스트라아 전역을 쉽쓸었던 유명한 가수였는데, 슈베르트는 포글과 함께 다니며, 그가 노래를 부를때 반주를 해 주거나, 혼자서 독주를 했다. 그로 인해 그는 돈을 좀 벌긴 했는데, 그는 돈을 모으지 않고, 그간 자신을 도와 주었던 친구들 (몇달씩 신세를 지며 돌아다녔던 많은 친구들)에게 한턱씩 쏘는데 돈을 다 써버렸다.
▲대중들과 친구들 앞에서 곡을 연주하고 있는 슈베르트
사실 그는 친구들 집에 염치없게 눌러앉아 있긴 했지만, 이를 용인해준 친구들을 본다면 그의 성격이 단지 염치없는 사람만은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그의 주변엔 항상 친구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욕심이 없고 사람들을 좋아하고 천진난만하고 순수하여서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몇달씩간이나 친구들 집에 얹혀 살면서 작곡도 할 수 있었던 이다. 그는 돈을 모으고 자신을 삶을 꾸리기 보다, 친구들과 차나 술을 한잔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애당초,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거나(베토벤과는 철저히 반대되는 삶이었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것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곡을 사람들에게 연주해 보이는것 외에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공식적인 자신만의 연주회를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해에 딱 한번만 가졌었다.
슈베르트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그의 작품은 생전 그다지 유명세를 타거나, 잘 출판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의 1000여개의 곡들중 약 100여곡만이 출판되었고, 이 조차도 헐값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재평가되어 '가곡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긴 했지만, 살아 생전 그의 삶은 슈베르트 스스로가 만족하는데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멘델스존의 특징이라면, 그의 유복한 가정환경을 들 수 있겠다. 그러한 그의 환경은 그를 진보적인 성향보다 보수적인 성향쪽으로 기울게 했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당대 유행했던 낭만주의 음악보다 우선은 고전주의적 성향을 띄게 했다.
▲멘델스존의 초상화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의 성장 환경때문에 아무래도 모험적인 것 보다는 편안하고 안정적인것을 추구한것이 자연스럽다는 평가다. 하지만, 음악적 배경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의 음악적 내용들은 사실 고전주의적이지 만은 않았다.(당시 고전주의라 함은 음의 결합에 관심을 둔 것이라 하자.) 그의 음악은 수학적이고 화성악적인 고전주의보다는 오히려 한편의 서정시나, 그림과 같은 작품을 썼다. 예를들면, <한여름 밤의 꿈>, <핑갈의 동굴>, <스코틀랜드>와 같은 그림들은 한폭의 그림인듯, 한편의 이야기 인듯 느껴진다.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멘델스존의 '스코틀랜드'
멘델스존은 인간의 고뇌를 통한 성철이라기 보다는, 그의 타고난 천재성만으로 만들어진 음악은, 아무래도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먹으면 맛이 있는 대중적이고 명쾌한 음악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어느것 하나에 미치면 끝을 볼때까지 그것만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매니아 라고 부른다. '슈베르트'역시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은 자신의 생계나 가족까지 포기하지는 않는 선을 지키지만, 슈베르트의 경우는 달랐다. 슈베르트는 작곡을 위해 직장도, 심지어 자신의 사랑했던 연인까지 포기해야 했다. 직장의 경우는 교장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버지에 의해 얻었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중이었던 경우인데, '매일밤 괴테의 시를 읽고 그 감동을 음악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면서 아침이면 학교에 나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마음의 평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라는 후문이다. 슈베르트는 한번 악상이 떠오르면 그대로 몇시간만에 오선지를 가득 채워버릴 정도로 집중력이 강했다고 한다. 괴테의 시 마왕을 읽고 반주까지 다 작곡하는데 불과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Erlkoni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Wer reitet so spat durch Nacht und Wind?
Es ist der Vater mit seinem Kind;
er hat den Knaben wohl in dem Arm,
er faßt ihn sicher, er halt ihn warm.
Mein sohn, was birgst du so bang dein Gesicht? -
Siehst, Vater du den Erlkonig nicht?
Den Erlenkonig mit Kron' und Schweif? ――
Mein Sohn, es ist ein Nebelstreif.
"Du liebes kind, komm, geh' mit mir!
Gar schone Spiele spiel' ich mit dir;
Manch' bunte Blumen sind an dem Strand,
meine Mutter hat manch' gulden Gewand."
Mein Vater, mein Vater, und horest du nicht,
was Erlenkonig mir leise verspricht? ――
Sei ruhig, bleibe ruhig, mein kind;
In durren Blattern sauselt der Wind. ――
"Willst feiner Knabe, du mit mir gehn?
Meine Tochter sollen dich warten schon;
Meine Tochter fuhren den nachtlichen Reihn,
und wiegen und tanzen und singen dich ein,
Sie wiegen und tanzen und singen dich ein."
Mein Vater, mein Vater, und siehst du nicht dort
Erlkonigs Tochter am dustern Ort? ――
Mein Sohn, mein Sohn, ich seh' es genau;
Es scheinen die alten Weiden so grau. ――
"Ich liebe dich, mich reizt deine schone Gestalt;
Und bist du nicht willig, so brauch' ich Gewalt." ―
Mein Vater, mein Vater, jetzt faßt er mich an!
Erlkonig hat mir ein Leids getan!
Dem Vater grauset's, er reitet geschwind,
er halt in Armen das achzende Kind,
Erreicht den Hof mit Muh' und Not;
In seinen Armen das Kind war tot.
▲괴테의 시 '마왕' 원문
마왕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누가 늦은 밤 말을 달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 아이를 품에 안고,
품에 안고 달리네, 따뜻하게.
"아가, 무엇 때문에 떠느냐?"
"아버지, 마왕이 안 보여요?
검은 옷에다 관을 썼는데?"
"아가, 그것은 안개다."
"예쁜 아가 이리 오렴!
함께 재밌게 놀자꾸나.
예쁜 꽃이 피어 있단다
너에게 줄 예쁜 황금빛 옷"
"아버지, 아버지, 들리잖아요,
저 마왕이 속삭이는 소리?"
"진정해 진정해라 아가!
낙엽이 날리는 소리다."
"예쁜 아가 나랑 가볼래?"
예쁜 내 딸이 너를 기다려.
너와 함께 밤 강가로 갈거야.
함께 춤추며 노래 부를거야. 함께 춤추며 노래 부를거야."
"아버지 아버지 보이잖아요
마왕의 딸 서있는 것이?"
"아가 아가 보고 있단다,
그것은 오래된 나무란다."
"네가 좋아, 이 끌리는 예쁜 모습,
네가 싫어해도, 데려가야지."
"아버지 아버지 나를 덮쳐요!
마왕이 나를 끌고 가요!"
아버지 지급히 말을 달려가,
그의 품 안에 신음하는 아기.
그가 집에 다 왔을 때
품속의 아기는 죽었네!
▲괴테의 시 '마왕' 번역본
시의 내용을 보면 "잉? 이런걸 가지고 무슨 가곡을 쓴담?"라는 생각이 들지만, 슈베르트는 달랐다. 짐작해 보면, 아마도 심각한 병에 걸린 아들을 밤늦게 의사에게 데려가기위해 말을 타고 달리는 중에 아이는 죽음을 앞두고 사경을 헤메는 중 마왕을 보고 이를 아버지에게 말하는 장면이고, 결국은 집에 도착했을때, 아이는 사망했다는 이야기 인듯 하다. 슈베르트는 이를 음악으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슈베르트의 '마왕'
곡의 분위기는 여느 슈베르트의 곡들처럼 그리 밝지는 않다. 확실이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는듯 하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내용, 뭔가 위기가 느껴진다. 괴테의 '마왕'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예술적 소재로 사용되었다. 회화의 경우 다양한 화가에 의한 소재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들어라 종달새(Lan Bostridge) 의 경우에도 술집에서 친구가 읽고 있던 실레거의 시지블 빼앗아 읽다가 메뉴판 뒤에 오선을 그리고 음표를 넣어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술집에서 시집을 읽는 풍조가 있었나 보다..지금과는 사뭇 다른...
▲ Lan Bostridge by Schubert
이같은 열정때문에 그는 그의 사랑하는 연인과도 이루어 질 수 없었나 보다.. 학교를 그만둔 슈베르트는 친구들집을 전전하며 겨우 생활했다. 1년에도 몇번씩 친구들 집을 옮겨다녔던 그는 작곡을 위한 피아노도 한대 없어서 기타로 작곡했다고 한다. 그를 방문했던 휘텐브래너라는 사람의 말을 빌자면 그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그는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그리고 난방도 없는 작은 방에서 낡고 해진 잠옷을 걸치고 떨면서 작곡을 하고 있었다."
멘델스존은 철학자 할아버지, 은행가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어릴때 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또한 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가에, 영문학, 불문학, 이탈리아 문학까지 연구했던 지적인 여성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 뿐만 아니라 4살 위인 그의 누나역시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풍족한 어린시절으리 보낼수 있었다. 그의 음악적 스승은 철학자 괴테와 절친한 음악가 첼터 였는데, 그의 지도아래 열살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열한살때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은 <한여름 밤의 꿈>을 썼는데 그중 행진곡은 오늘날 결혼식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F.Mendelssohn. A Midsummer Night's Dream. Wedding March
그에게 주어진 음악적 환경은 최상의 것이었다. 그는 전속 오케스트라를 두고 있어서 언제든 작곡하고 시연해 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유럽중 안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많은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경험이 그의 음악적 견문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모차르트나 베토벤역시 유럽여행을 하였지만, 그들의 여행은 돈을 벌기 위한 여행이었지 음악적 견문을 위한 여행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의 교육적 영향아래 그는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 각국의 언어에 능통하였다. 또한 수채 풍경화 솜씨는 아마추어를 뛰어넘는 범주였다고 한다.
▲ 멘델스존의 수채화(출처: wikipedia.org)
음악적 거장들의 특징을 나열하다 보면, 사실 공통점이 그리 많지는 않다. 공통점이라면 10살 전에 작곡을 시작했다는 점? 하지만, 그중에는 음악적으로 좋은 환경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중요한건 그러한 환경으로 인해 음악가의 작품의 느낌과 냄새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음악은 뭔가 진중하고 진지하고 어떨때는 좀 우울하기도 하다. 아마 직접 베토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다면 그는 분명 굉장히 진지한 사람일 것이다. 반면 모차르트를 직접 만나본다면 그는 분명 가볍지만 유쾌하고 재밋는 사람일 것이다. 만약 멘델스존을 만나본다면, 그는 다박바식하고 교양있는 사람일 것이다. 사실 브람스 역시 멘델스존과 비슷한 느낌의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건축가가 멘델스존과 비슷한 범주의 사람일텐데, 왜냐하면 건축가는 자신의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의 꿈을 이루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이라고 한다면, 특히 작가주의적으로 접근할때, 그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피력하고 성취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 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다양한 경험과 각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멘델스존이야 말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오늘날 많은 클래식 음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매주 결혼식장 행진할때 듣는 음악이야 말로 가장 빈도수 높은 음악일 테니까, 사실 멘델스존이야 말로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음악가가 아닐까?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모양이다. 슈베르트가 빈근교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빈의 음악적 영향을 덜 받고 자유로롭고 다양한 음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어머니가 폴란드 출신 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쨋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음악적 관심덕분에 슈베르트는 일찍 음악을 배울 수 있었고 또한 그의 음악수업을 맡았던 그의 큰형이 슈베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를 교회 교구의 오르간 지휘자에게 보내 수업을 받도록 했다. 그게 슈베르트 나이 8살 때였다. 이어 11살에 빈 궁정 예배당 소년 합창대에 들어 갔으며 동시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3세에 작곡을 시작해 5년간 무려 140개의 가곡을 작곡하였다.
모차르트의 라이벌인 살리에리에게 3년간 수업을 받던도중 열여섯살때 변성기가 찾아와 합창대를 떠나게 된다. 이어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교 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임종후 장례식때 친히 그의 관을 메었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그는 베토벤과 한마디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존경하게 되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보고 나서 였다.
이 작품을 보고나서부터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제자가 되고싶었다. 하지만 그무렵 베토벤은 몸이 좋지않아 앓아 눞게 되었고 그의 병상에 방문한 슈베르트는 그의 가곡 몇곡을 들려주었다. 이에 베토벤은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들이다"라고 칭찬했지만, 수줍은 성격의 슈베르트는 한마디도 못한채 결국 베토벤을 보내고 말았다. 며칠뒤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친히 베토벤의 관을 메었다.
<멘델스존>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에 대한 포스팅을 한지도 벌써 두달 가까이 흘렀다. 하지만, 이제 1권의 절반 정도밖에 진도를 나가지 못했으니, 클래식이란 장르 전체를 다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대한 양을 이런 책 리뷰 형태로 포스팅 한다는게 보통일이 아님을 다시한번 느낀다. 원래 보통의 다른 책 리뷰의 경우, 쭉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생각나는 대로 내 생각을 덧 붙여서 쓰면 되지만,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의 경우, 단지 느껴지는 것을 쓸수만은 없고, 놓쳐서는 안되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따라가다 보니, 부득이 한 포스팅에 한 음악가, 심지어 한 음악아에 대해 수많은 포스팅으로 다뤄야 겨우 커버가 되고 있다. 좀 지루한 감이 없진 않지만, 이미 시작한거 끝내 버리고 어서 다른 책으로 넘어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이 시점에 불끈 불끈 들고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에 대해 다루겠다. 금난새 형님께서는 항상 동시대 비슷한 연배의 두명의 음악가를 약간의 대립적 관점으로 다루셨다. 완전히 서로 대립되지는 않지만, 서로다른 배경으로 인한 서로다른 음악형태 및 성격으로 귀결되어 결국 둘다 성공한 음악가가 되긴했지만, 같은 음악가가 아닌 다른 음악가가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것 같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이번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의 큰 차이점부터 짚어가 보자.
<먼저>.. 프란츠 페테르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슈베르트의 삶은 한송이 들장미와 같았다. 그의 삶은 외롭고 쓸쓸했고 가난했고 처량했다. 그는 나그네였다. 화려한 연주나, 청중의 환호도 없었다. 자신만의 음악에 빠져 있다가 서른살에 요절한 비운의 젊은이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친구 집을 돌아 다니며 전전긍긍했던 그의 삶은 너무나 안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삶을 통해 애잔하고 가슴애는 서정적인 음악이 산출되었다. <겨울나그네>, <들장미>, <보리수>와 같은 그의 대표곡들을 통해 볼수 있듯이, 그의 음악은 한폭의 그림과도 같고, 또 실제로 그가 쓴 시를 선율에 담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창조하기도 했다.
반면 멘델스존은 어느하나 모자랄것 없이 모든것을 소유한 풍족한 상류계층 이었다. 피아노도 없어서 기타하나로 작곡을 했던 슈베르트와 달리, 멘델스존은 집에 별도의 오케스트라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유대인이라는 유일한 핸디캡을 제외하곤 그에게 핸디켑은 없었다. 때문에 멘델스존의 음악은 항상 긍정적인 분위기, 경쾌하고 기존의 질서나 형식에 반항하지 않고 고전주의의 틀속에서 당대 유행했던 낭만주의를 그대로 녹여 반영한 음악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음악에는 사람의 심금을 파고드는 곡은 없다. 그도 그럴듯이 그가 아픔이나, 슬픔, 어두움을 겪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성숙된 곡이 나오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로시니는 베토벤보다 22년을 어리게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음악가였으므로, 로시니는 어릴적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로시니의 천재성은 그가 열두살에 이미 현악 4중주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고, 열 네살에 오페라를 쓴 것을 보면 잘 알수가 있다. 그는 15세때 부터 정식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나, 수업시간에 배우는것보다 혼자서 고전파 선배들의 음악을 연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의 성공가도는 1810년 베네치아에서의 <결혼어음>이라는 오페라를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이후로 북부의 많은 극장들이 로시니에게 음악주문을 하였고, 로시니는 이를 소화해 내면서 자신의 기반을 세워 나갔다.
짧은 시간내에 음악을 완성하는동안 많은 실수가 생겼지만, 로시니의 낙천적 성격은 이를 무마했다. 그가 주장했던 그의 작업프로세스는 총 6주인데 이중 4주는 실컷 놀면서 아이디어를 내고 나머지 2주동안 모든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오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대중이 듣기좋고 아름다워 인기가 있었으며, 곧 전국적으로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20대 초반 그는 작곡가뿐 아니라 지휘자, 극장장으로도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탄크레디>,<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자>, <세빌랴의 이발사>등을 발표하며 일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초기 로시니의 작품은 고전파 음악의 형식인 소나타 형식을 따랐으나 점차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리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던 '콜로라투라(coloratura)-소프라노 가수가 빠르고 구슬을 굴리는 듯한 발성을 이용하여 매우 기교적으로 노래하는 창법. 음역이 높은 경우가 많아 가장 화려하게 들리는 성악 가창법의 일종이며, 18~19세기 오페라, 특히 이탈리아 아리아에서 많이 쓰임'를 없애는 것을 시도했고, 큰 장면 중심으로 이야기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지어지도록 했다.
1829년 로시니 프랑스에서 연금과 보수를 받으며 <빌헬름 텔>을 작곡하여 무대에 올랐으나,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로인해 로시니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빌헬름텔 서곡>
-빌헬름텔 서곡은 크게 4파트로 나누어 진다. 도입부는 저음현악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로 시작되며 이는 '스위스의 해돋이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2부는 제 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작은 음들을 트레몰로처럼 연결하며 시작하며, 이어 짧은 음을 반복하는 목관들의 연주가 점점 굵어지고, 점차 많은 악기들이 참여하면서 큰 소리를 내게 된다. 곧 3부에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광경을 연출하는데 이는 목동과 새,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대화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다시 활기찬 분위기로 시작되는데 트럼펫이 사용된다. 여기에 호른과 팀파니가 합세하여 진격하는 군대의 힘찬 행진을 보여준다.-
로시니의 특징중 하나는 엄청난 유머감각이었는데, 어느 만찬회에 초대받고 돌아가는 길에 그 집 부인이 "또 오십시오"라고 하자, 곧바로 "지금이라도 괜찮나요?"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밀라노 시에서 많은 돈을 들여 로시니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한다는 말을 듣자, "나에게 많은 돈을 주면 자신이 매일 서 있어 줄 수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후에 빌헬름텔은 매우 유명하여 져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라로 인정받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로시니는 37세에 음악을 그만두고 은퇴하였다. 그에 대해 많은 후설이 있지만, 첫째로 그가 신경계 질환으로 인한 발작으로 더이상 음악을 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고, 둘째로 그가 이미 당시 많은 돈을 벌었으므로, 더이상 음악으로 돈을 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만년에 그는 그의 고향 볼로냐로 건너가 볼로냐 음악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무렵 그는 엄청난 미식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본인 스스로의 요리책을 내기까지 했다.
로시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큰 요인은 (물론 그의 천재성이 뒷바침 했음) 바로 시대적 분위기 였다. 당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한 사회적으로 암울한 분위기, 그리고 베토벤의 심각한 음악적 분위기는 이제 사람들로 하여금 지치게 했고, 좀 밝고 경쾌한 음악을 요구하였다. 만약 로시니의 음악이 베토벤처럼 무겁고 진지한 음악이었다면, 아마 지금만큼 유명해 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