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2일 금요일

[차이코프스키] - 러시아 음악을 세계로 이끌다


차이코프스키 - 러시아 음악의 세계화


결혼의 실패로 큰 충격을 받아 이리저리 방황하던 차이코프스키, 그는 187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다. 경제적으로는 폰 메크부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정신적인 고통도 어느정도 극복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시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작곡된 곡이 바이올린 협주곡, 오페라<오를레앙의 소녀>,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G장조, 장엄서곡(Overture)<1812년>등이다.


<장엄하게 시작하는 차이코프스키의 잘 알려진 곡중 하나인 피아노협주곡 1번>


<'노다메칸타빌레 인 유럽'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차이코프스키 Overture 1812>

1887년 부터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에만 머물지 않고 유럽과 미국등 여러 나라에서 자신의 곡을 직접 지휘하면서 자신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또 대부분 좋은 평을 받았다. 그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고전 음악만을 높게 평가해 온 사람들에게 러시아 음악은 신선한 것이었고 러시아 음악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보여준 러시아 음악은 서유럽의 클래식음악에 결코 뒤처질 뿐만 아니라, 러시아 특유의 정서와 감성마저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실 러시아의 음악은 황무지나 다름 없었다. 서유럽의 경우 이미 오래전부터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등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에 의해 클래식 음악의 기초가 탄탄하게 잡혀진 상태에서 18세기 후반 다양한 개성을 갖춘 음악가들이 이 음악적 형식의 기초위에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음악을 펼친 반면, 러시아는 차이코프스키가 그러한 기초를 세움과 동시에 러시아적 향미까지 첨가하여야 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차이코프스키는 형식적인 고전음악에 충실했던 그의 스승 루빈스타인의 영향을 받아 이런 기본적 고전형식을 충실이 지켜냈고, 이것이 바로 러시아음악이 세계적인 무대에서 조명을 받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훗날 일각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지나치게 서유럽중심의 음악에 치중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으나, 그것은 이제 먹을만큼 배불러진 상태가 되니 비로소 할 수 있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차이코프스키가 서유럽의 음악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러시아는 아직도 음악적 불모지에서 돌이나 캐고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차이코프스키는 어릴적 러시아 민요의 주 무대였던 광산지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러시아 민속적 음악요소가 몸에 배여 있었고, 러시아 음악이 세계로 흘러나갈때 이러한 민요적 요소까지 녹여서 흘려 보냈다. 이처럼 서양 음악의 고유한 세련미와 러시아 민요적 정서가 녹아든 그의 음악은 유럽을 비롯한 외국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일수 밖에 없었다. 

1891년 미국 순회 공연중 뉴욕 카네기 홀 연주회는 차이코프스키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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