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9일 일요일

Classic travel -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门德尔松)-(3) 푸줏간에서 바흐의 악보를 발견하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바흐를 세상에 알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다름아닌 멘델스존이다. 우연한 사건이긴 했지만, 평소 바흐에 관심이 많았던 멘델스존이 아니었다면, 바흐는 정말 역사속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었다. 

어느날 멘델스존이 고기를 사러 푸줏간에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한 여자손님이 고기를 사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고기를 싸려는 포장지가 뭔가 이상하단 것을 발견했다. 곧바로 멘델스존은 경약하고 말았는데, 그 포장지가 다름아닌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작, 마태복음 예수 수난곡' 이었기 때문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흐는 세상에 알려져 대중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멘델스존 역시 유명한 지휘자로 명성을 얻는 계기 가 되었다.


2015년 3월 27일 금요일

classic travel - 슈베르트(3) (Schubert, 舒伯特) - 출세에 관심없고 친구가 많았던 성품좋은 예술가

슈베르트가 대중에게 잠시 알려진 적이 있었는데, 쉽게 얘기하면 당시 대중적인 스타가수였던 미하엘 포글 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였다. 포글은 당대 오스트라아 전역을 쉽쓸었던 유명한 가수였는데, 슈베르트는 포글과 함께 다니며, 그가 노래를 부를때 반주를 해 주거나, 혼자서 독주를 했다. 그로 인해 그는 돈을 좀 벌긴 했는데, 그는 돈을 모으지 않고, 그간 자신을 도와 주었던 친구들 (몇달씩 신세를 지며 돌아다녔던 많은 친구들)에게 한턱씩 쏘는데 돈을 다 써버렸다.


 ▲대중들과 친구들 앞에서 곡을 연주하고 있는 슈베르트


사실 그는 친구들 집에 염치없게 눌러앉아 있긴 했지만, 이를 용인해준 친구들을 본다면 그의 성격이 단지 염치없는 사람만은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그의 주변엔 항상 친구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욕심이 없고 사람들을 좋아하고 천진난만하고 순수하여서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몇달씩간이나 친구들 집에 얹혀 살면서 작곡도 할 수 있었던 이다. 그는 돈을 모으고 자신을 삶을 꾸리기 보다, 친구들과 차나 술을 한잔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애당초,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거나(베토벤과는 철저히 반대되는 삶이었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것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곡을 사람들에게 연주해 보이는것 외에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공식적인 자신만의 연주회를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해에 딱 한번만 가졌었다. 

슈베르트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그의 작품은 생전 그다지 유명세를 타거나, 잘 출판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의 1000여개의 곡들중 약 100여곡만이 출판되었고, 이 조차도 헐값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재평가되어 '가곡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긴 했지만, 살아 생전 그의 삶은 슈베르트 스스로가 만족하는데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초상

2015년 3월 26일 목요일

Classic travel -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门德尔松)-(2) 고전주의에 낭만주의를 더하다다

멘델스존의 특징이라면, 그의 유복한 가정환경을 들 수 있겠다. 그러한 그의 환경은 그를 진보적인 성향보다 보수적인 성향쪽으로 기울게 했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당대 유행했던 낭만주의 음악보다 우선은 고전주의적 성향을 띄게 했다.


▲멘델스존의 초상화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의 성장 환경때문에 아무래도 모험적인 것 보다는 편안하고 안정적인것을 추구한것이 자연스럽다는 평가다. 하지만, 음악적 배경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의 음악적 내용들은 사실 고전주의적이지 만은 않았다.(당시 고전주의라 함은 음의 결합에 관심을 둔 것이라 하자.) 그의 음악은 수학적이고 화성악적인 고전주의보다는 오히려 한편의 서정시나, 그림과 같은 작품을 썼다. 예를들면, <한여름 밤의 꿈>, <핑갈의 동굴>, <스코틀랜드>와 같은 그림들은 한폭의 그림인듯, 한편의 이야기 인듯 느껴진다.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멘델스존의 '스코틀랜드'


멘델스존은 인간의 고뇌를 통한 성철이라기 보다는, 그의 타고난 천재성만으로 만들어진 음악은, 아무래도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먹으면 맛이 있는 대중적이고 명쾌한 음악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2015년 3월 25일 수요일

classic travel - 슈베르트(2) (Schubert, 舒伯特) - '마왕'의 작곡에 대해서(작곡에 미쳐 모든것을 포기하다)

어느것 하나에 미치면 끝을 볼때까지 그것만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매니아 라고 부른다. '슈베르트'역시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은 자신의 생계나 가족까지 포기하지는 않는 선을 지키지만, 슈베르트의 경우는 달랐다. 슈베르트는 작곡을 위해 직장도, 심지어 자신의 사랑했던 연인까지 포기해야 했다. 직장의 경우는 교장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버지에 의해 얻었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중이었던 경우인데, '매일밤 괴테의 시를 읽고 그 감동을 음악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면서 아침이면 학교에 나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마음의 평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라는 후문이다. 슈베르트는 한번 악상이 떠오르면 그대로 몇시간만에 오선지를 가득 채워버릴 정도로 집중력이 강했다고 한다. 괴테의 시 마왕을 읽고 반주까지 다 작곡하는데 불과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Erlkoni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Wer reitet so spat durch Nacht und Wind?
Es ist der Vater mit seinem Kind;
er hat den Knaben wohl in dem Arm,
er faßt ihn sicher, er halt ihn warm.

Mein sohn, was birgst du so bang dein Gesicht? -
Siehst, Vater du den Erlkonig nicht?
Den Erlenkonig mit Kron' und Schweif? ――
Mein Sohn, es ist ein Nebelstreif.

"Du liebes kind, komm, geh' mit mir!
Gar schone Spiele spiel' ich mit dir;
Manch' bunte Blumen sind an dem Strand,
meine Mutter hat manch' gulden Gewand."

Mein Vater, mein Vater, und horest du nicht,
was Erlenkonig mir leise verspricht? ――
Sei ruhig, bleibe ruhig, mein kind;
In durren Blattern sauselt der Wind. ――

"Willst feiner Knabe, du mit mir gehn?
Meine Tochter sollen dich warten schon;
Meine Tochter fuhren den nachtlichen Reihn,
und wiegen und tanzen und singen dich ein,
Sie wiegen und tanzen und singen dich ein."

Mein Vater, mein Vater, und siehst du nicht dort
Erlkonigs Tochter am dustern Ort? ――
Mein Sohn, mein Sohn, ich seh' es genau;
Es scheinen die alten Weiden so grau. ――

"Ich liebe dich, mich reizt deine schone Gestalt;
Und bist du nicht willig, so brauch' ich Gewalt." ―
Mein Vater, mein Vater, jetzt faßt er mich an!
Erlkonig hat mir ein Leids getan!


Dem Vater grauset's, er reitet geschwind,
er halt in Armen das achzende Kind,
Erreicht den Hof mit Muh' und Not;
In seinen Armen das Kind war tot.

▲괴테의 시 '마왕' 원문



마왕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누가 늦은 밤 말을 달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 아이를 품에 안고,
품에 안고 달리네, 따뜻하게.

"아가, 무엇 때문에 떠느냐?"
"아버지, 마왕이 안 보여요?
검은 옷에다 관을 썼는데?"
"아가, 그것은 안개다."

"예쁜 아가 이리 오렴!
함께 재밌게 놀자꾸나.
예쁜 꽃이 피어 있단다
너에게 줄 예쁜 황금빛 옷"

"아버지, 아버지, 들리잖아요,
저 마왕이 속삭이는 소리?"
"진정해 진정해라 아가!
낙엽이 날리는 소리다."

"예쁜 아가 나랑 가볼래?"
예쁜 내 딸이 너를 기다려.
너와 함께 밤 강가로 갈거야.
함께 춤추며 노래 부를거야. 함께 춤추며 노래 부를거야."

"아버지 아버지 보이잖아요
마왕의 딸 서있는 것이?"
"아가 아가 보고 있단다,
그것은 오래된 나무란다."

"네가 좋아, 이 끌리는 예쁜 모습,
네가 싫어해도, 데려가야지."
"아버지 아버지 나를 덮쳐요!
마왕이 나를 끌고 가요!"


아버지 지급히 말을 달려가,
그의 품 안에 신음하는 아기.
그가 집에 다 왔을 때
품속의 아기는 죽었네!

▲괴테의 시 '마왕' 번역본

시의 내용을 보면 "잉? 이런걸 가지고 무슨 가곡을 쓴담?"라는 생각이 들지만, 슈베르트는 달랐다. 짐작해 보면, 아마도 심각한 병에 걸린 아들을 밤늦게 의사에게 데려가기위해 말을 타고 달리는 중에 아이는 죽음을 앞두고 사경을 헤메는 중 마왕을 보고 이를 아버지에게 말하는 장면이고, 결국은 집에 도착했을때, 아이는 사망했다는 이야기 인듯 하다. 슈베르트는 이를 음악으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슈베르트의 '마왕'


곡의 분위기는 여느 슈베르트의 곡들처럼 그리 밝지는 않다. 확실이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는듯 하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내용, 뭔가 위기가 느껴진다. 괴테의 '마왕'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예술적 소재로 사용되었다. 회화의 경우 다양한 화가에 의한 소재가 되었다.


▲ ​'Erlkonig' Moritz von Schwind


▲ The Erlking by Albert Sterner, ca. 1910







마찬가지로 <들어라 종달새(Lan Bostridge) 의 경우에도 술집에서 친구가 읽고 있던 실레거의 시지블 빼앗아 읽다가 메뉴판 뒤에 오선을 그리고 음표를 넣어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술집에서 시집을 읽는 풍조가 있었나 보다..지금과는 사뭇 다른...

 ▲ Lan Bostridge by Schubert

이같은 열정때문에 그는 그의 사랑하는 연인과도 이루어 질 수 없었나 보다.. 학교를 그만둔 슈베르트는 친구들집을 전전하며 겨우 생활했다. 1년에도 몇번씩 친구들 집을 옮겨다녔던 그는 작곡을 위한 피아노도 한대 없어서 기타로 작곡했다고 한다. 그를 방문했던 휘텐브래너라는 사람의 말을 빌자면 그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그는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그리고 난방도 없는 작은 방에서 낡고 해진 잠옷을 걸치고 떨면서 작곡을 하고 있었다."

2015년 3월 22일 일요일

Classic travel -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门德尔松)

 언어,미술,음악등 다재다능한 음악가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


▲12세의 멘델스존 (출처:wikipedia.org)

멘델스존은 철학자 할아버지, 은행가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어릴때 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또한 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가에, 영문학, 불문학, 이탈리아 문학까지 연구했던 지적인 여성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 뿐만 아니라 4살 위인 그의 누나역시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풍족한 어린시절으리 보낼수 있었다. 그의 음악적 스승은 철학자 괴테와 절친한 음악가 첼터 였는데, 그의 지도아래 열살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열한살때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은 <한여름 밤의 꿈>을 썼는데 그중 행진곡은 오늘날 결혼식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F.Mendelssohn. A Midsummer Night's Dream. Wedding March

그에게 주어진 음악적 환경은 최상의 것이었다. 그는 전속 오케스트라를 두고 있어서 언제든 작곡하고 시연해 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유럽중 안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많은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경험이 그의 음악적 견문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모차르트나 베토벤역시 유럽여행을 하였지만, 그들의 여행은 돈을 벌기 위한 여행이었지 음악적 견문을 위한 여행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의 교육적 영향아래 그는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 각국의 언어에 능통하였다. 또한 수채 풍경화 솜씨는 아마추어를 뛰어넘는 범주였다고 한다.


▲ 멘델스존의 수채화(출처: wikipedia.org)

음악적 거장들의 특징을 나열하다 보면, 사실 공통점이 그리 많지는 않다. 공통점이라면 10살 전에 작곡을 시작했다는 점? 하지만, 그중에는 음악적으로 좋은 환경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중요한건 그러한 환경으로 인해 음악가의 작품의 느낌과 냄새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음악은 뭔가 진중하고 진지하고 어떨때는 좀 우울하기도 하다. 아마 직접 베토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다면 그는 분명 굉장히 진지한 사람일 것이다. 반면 모차르트를 직접 만나본다면 그는 분명 가볍지만 유쾌하고 재밋는 사람일 것이다. 만약 멘델스존을 만나본다면, 그는 다박바식하고 교양있는 사람일 것이다. 사실 브람스 역시 멘델스존과 비슷한 느낌의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건축가가 멘델스존과 비슷한 범주의 사람일텐데, 왜냐하면 건축가는 자신의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의 꿈을 이루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이라고 한다면, 특히 작가주의적으로 접근할때, 그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피력하고 성취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 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다양한 경험과 각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멘델스존이야 말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오늘날 많은 클래식 음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매주 결혼식장 행진할때 듣는 음악이야 말로 가장 빈도수 높은 음악일 테니까, 사실 멘델스존이야 말로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음악가가 아닐까?


2015년 3월 16일 월요일

Classic travel - 슈베르트(1) (Schubert, 舒伯特)

뛰어난 재능의 소년 슈베르트




 1756 모차르트 출생
1770 베토벤 출생
1797 슈베르트 출생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모양이다. 슈베르트가 빈근교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빈의 음악적 영향을 덜 받고 자유로롭고 다양한 음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어머니가 폴란드 출신 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쨋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음악적 관심덕분에 슈베르트는 일찍 음악을 배울 수 있었고 또한 그의 음악수업을 맡았던 그의 큰형이 슈베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를 교회 교구의 오르간 지휘자에게 보내 수업을 받도록 했다. 그게 슈베르트 나이 8살 때였다. 이어 11살에 빈 궁정 예배당 소년 합창대에 들어 갔으며 동시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3세에 작곡을 시작해 5년간 무려 140개의 가곡을 작곡하였다. 

모차르트의 라이벌인 살리에리에게 3년간 수업을 받던도중 열여섯살때 변성기가 찾아와 합창대를 떠나게 된다. 이어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교 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임종후 장례식때 친히 그의 관을 메었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그는 베토벤과 한마디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존경하게 되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보고 나서 였다.



이 작품을 보고나서부터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제자가 되고싶었다. 하지만 그무렵 베토벤은 몸이 좋지않아 앓아 눞게 되었고 그의 병상에 방문한 슈베르트는 그의 가곡 몇곡을 들려주었다. 이에 베토벤은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들이다"라고 칭찬했지만, 수줍은 성격의 슈베르트는 한마디도 못한채 결국 베토벤을 보내고 말았다. 며칠뒤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친히 베토벤의 관을 메었다.

2015년 3월 13일 금요일

빈민 슈베르트와 갑부 멘델스존(Poor Schubert and rich Mendelssohn)-舒伯特和门德尔松最富有的穷人



빈민 슈베르트 VS 갑부 멘델스존

<슈베르트>

<멘델스존>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에 대한 포스팅을 한지도 벌써 두달 가까이 흘렀다. 하지만, 이제 1권의 절반 정도밖에 진도를 나가지 못했으니, 클래식이란 장르 전체를 다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대한 양을 이런 책 리뷰 형태로 포스팅 한다는게 보통일이 아님을 다시한번 느낀다. 원래 보통의 다른 책 리뷰의 경우, 쭉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생각나는 대로 내 생각을 덧 붙여서 쓰면 되지만,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의 경우, 단지 느껴지는 것을 쓸수만은 없고, 놓쳐서는 안되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따라가다 보니, 부득이 한 포스팅에 한 음악가, 심지어 한 음악아에 대해 수많은 포스팅으로 다뤄야 겨우 커버가 되고 있다. 좀 지루한 감이 없진 않지만, 이미 시작한거 끝내 버리고 어서 다른 책으로 넘어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이 시점에 불끈 불끈 들고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에 대해 다루겠다. 금난새 형님께서는 항상 동시대 비슷한 연배의 두명의 음악가를 약간의 대립적 관점으로 다루셨다. 완전히 서로 대립되지는 않지만, 서로다른 배경으로 인한 서로다른 음악형태 및 성격으로 귀결되어 결국 둘다 성공한 음악가가 되긴했지만, 같은 음악가가 아닌 다른 음악가가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것 같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이번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의 큰 차이점부터 짚어가 보자.



<먼저>.. 프란츠 페테르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슈베르트의 삶은 한송이 들장미와 같았다. 그의 삶은 외롭고 쓸쓸했고 가난했고 처량했다. 그는 나그네였다. 화려한 연주나, 청중의 환호도 없었다. 자신만의 음악에 빠져 있다가 서른살에 요절한 비운의 젊은이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친구 집을 돌아 다니며 전전긍긍했던 그의 삶은 너무나 안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삶을 통해 애잔하고 가슴애는 서정적인 음악이 산출되었다. <겨울나그네>, <들장미>, <보리수>와 같은 그의 대표곡들을 통해 볼수 있듯이, 그의 음악은 한폭의 그림과도 같고, 또 실제로 그가 쓴 시를 선율에 담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창조하기도 했다.






<다음>.. 펠릭스 멘델스존




반면 멘델스존은 어느하나 모자랄것 없이 모든것을 소유한 풍족한 상류계층 이었다. 피아노도 없어서 기타하나로 작곡을 했던 슈베르트와 달리, 멘델스존은 집에 별도의 오케스트라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유대인이라는 유일한 핸디캡을 제외하곤 그에게 핸디켑은 없었다. 때문에 멘델스존의 음악은 항상 긍정적인 분위기, 경쾌하고 기존의 질서나 형식에 반항하지 않고 고전주의의 틀속에서 당대 유행했던 낭만주의를 그대로 녹여 반영한 음악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음악에는 사람의 심금을 파고드는 곡은 없다. 그도 그럴듯이 그가 아픔이나, 슬픔, 어두움을 겪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성숙된 곡이 나오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2015년 3월 12일 목요일

Humorous musician - Gioacchino Rossini(익살스런 음악가 로시니)- 诙谐的音樂家罗西尼

이탈리아의 천재음악가 로시니

로시니는 베토벤보다 22년을 어리게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음악가였으므로, 로시니는 어릴적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로시니의 천재성은 그가 열두살에 이미 현악 4중주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고, 열 네살에 오페라를 쓴 것을 보면 잘 알수가 있다. 그는 15세때 부터 정식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나, 수업시간에 배우는것보다 혼자서 고전파 선배들의 음악을 연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의 성공가도는 1810년 베네치아에서의 <결혼어음>이라는 오페라를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이후로 북부의 많은 극장들이 로시니에게 음악주문을 하였고, 로시니는 이를 소화해 내면서 자신의 기반을 세워 나갔다.



짧은 시간내에 음악을 완성하는동안 많은 실수가 생겼지만, 로시니의 낙천적 성격은 이를 무마했다. 그가 주장했던 그의 작업프로세스는 총 6주인데 이중 4주는 실컷 놀면서 아이디어를 내고 나머지 2주동안 모든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오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대중이 듣기좋고 아름다워 인기가 있었으며, 곧 전국적으로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20대 초반 그는 작곡가뿐 아니라 지휘자, 극장장으로도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탄크레디>,<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자>, <세빌랴의 이발사>등을 발표하며 일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초기 로시니의 작품은 고전파 음악의 형식인 소나타 형식을 따랐으나 점차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리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던 '콜로라투라(coloratura)-소프라노 가수가 빠르고 구슬을 굴리는 듯한 발성을 이용하여 매우 기교적으로 노래하는 창법. 음역이 높은 경우가 많아 가장 화려하게 들리는 성악 가창법의 일종이며, 18~19세기 오페라, 특히 이탈리아 아리아에서 많이 쓰임'를 없애는 것을 시도했고, 큰 장면 중심으로 이야기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지어지도록 했다.

1829년 로시니 프랑스에서 연금과 보수를 받으며 <빌헬름 텔>을 작곡하여 무대에 올랐으나,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로인해 로시니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빌헬름텔 서곡>
-빌헬름텔 서곡은 크게 4파트로 나누어 진다. 도입부는 저음현악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로 시작되며 이는 '스위스의 해돋이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2부는 제 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작은 음들을 트레몰로처럼 연결하며 시작하며, 이어 짧은 음을 반복하는 목관들의 연주가 점점 굵어지고, 점차 많은 악기들이 참여하면서 큰 소리를 내게 된다. 곧 3부에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광경을 연출하는데 이는 목동과 새,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대화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다시 활기찬 분위기로 시작되는데 트럼펫이 사용된다. 여기에 호른과 팀파니가 합세하여 진격하는 군대의 힘찬 행진을 보여준다.-

로시니의 특징중 하나는 엄청난 유머감각이었는데, 어느 만찬회에 초대받고 돌아가는 길에 그 집 부인이 "또 오십시오"라고 하자, 곧바로 "지금이라도 괜찮나요?"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밀라노 시에서 많은 돈을 들여 로시니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한다는 말을 듣자, "나에게 많은 돈을 주면 자신이 매일 서 있어 줄 수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후에 빌헬름텔은 매우 유명하여 져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라로 인정받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로시니는 37세에 음악을 그만두고 은퇴하였다. 그에 대해 많은 후설이 있지만, 첫째로 그가 신경계 질환으로 인한 발작으로 더이상 음악을 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고, 둘째로 그가 이미 당시 많은 돈을 벌었으므로, 더이상 음악으로 돈을 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만년에 그는 그의 고향 볼로냐로 건너가 볼로냐 음악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무렵 그는 엄청난 미식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본인 스스로의 요리책을 내기까지 했다.






로시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큰 요인은 (물론 그의 천재성이 뒷바침 했음) 바로 시대적 분위기 였다. 당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한 사회적으로 암울한 분위기, 그리고 베토벤의 심각한 음악적 분위기는 이제 사람들로 하여금 지치게 했고, 좀 밝고 경쾌한 음악을 요구하였다. 만약 로시니의 음악이 베토벤처럼 무겁고 진지한 음악이었다면, 아마 지금만큼 유명해 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2015년 3월 10일 화요일

Classic travel - beethoven overcame his ear problem with his passion

베토벤에게 찾아온 가장큰 시련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그의 나이 20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청각장애는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으나, 32세가 될 무렵에는
베토벤 자신 조차도 매우 심각한 병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는 더이상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고,
엄청난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음악밖에 모르는 베토벤에게, 음악을 더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하일리겐슈타트로 내려간 베토벤은 자신의 동생들에게 
유서를 썼다. 하지만 그는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았다.

"가슴 속에 있는 창작의 요구를 다 채우기 전에는 세상을 떠날 수 없었다."
"나는 운명의 끝을 붙잡겠다."
"병이 치유되기만 한다면 나는 온 세계를 담아낼 것이다."

49세 베토벤은 더이상 다른사람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항상 노트를 들고 다니며 글로 적어가며 사람들과 이야기 할 정도였다.
이제 베토벤은 작곡에만 힘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오랜 산책을 통해 그는 스케치북에 악상을 적어내려갔다.

베토벤의 작곡방법을 모차르트와 비교해 보면
정 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모차르트는 한번 작곡할때 절대 수정을 가하지 않았다.
한번 써내려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한곡을 4년씩 썼는데,
엄청난 수정을 가하는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베토벤 교향곡 제 5번 <운명>의 경우
1804년부터 스케치를 시작하여 1808년에야 완성이 되었다.

그는 소리를 들을수 없게 되자
그전에 기울였던 노력에 수백 수천배의 노력을 기울여
악곡들을 완성해 나갔다.

따라서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주옥같은 곡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교향곡 제 5번 (Symphony No.5) (운명)>


<교향곡 제 6번 (Symphony No.6) (전원)>




<피아노 협주곡  제 5번 (Piano concerto No.5) (황제)>




등이 이당시 지어진 곡들이었다.



황제, 전원 등은 베토벤 본인이 붙인 제목이었다.
하지만 교향곡 제 5번의 <운명>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인데,
서두 시작이 마치 운명이 갑작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느낌의 곡이라 후문이다.

제 1장은 갑자기 찾아온 운명
제 2장은 경건한 기도로 마음을 달램
제 3장은 인생에 대한 풍자
제 4장은 운명을 극복한 승자의 환희
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운명 교향곡은 엄격한 고전파의 맥을 유지하는 한편
개인이 지닌 내면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여서
후에 이어지는 낭만파 가도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15년부터 1827년 그의 사망사이 12년간 그는 매우 소수의 작품만을 썼다.
하지만 그 완성도는 이전 그 어느작품보다도 높았다.
그의 인생의 모든 경험이 이 작품들에 녹아들어갔다.


베토벤 교향곡 제 9번 <합창>
Beethoven Symphony No.9




이 곡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힘으로 쓸 수 있었던 가장 완전하고 위대한 곡!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압도적 감동으로 이끄는 교향곡!" 

베토벤의 대표작을 꼽으라고 한다면
교향곡 제 5번 <운명>
교향곡 제 9번 <합창>

이 두가지를 들 수 있겠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한가지는,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온전해 지고
성숙해 지며 완성도가 높아 진다는 점이다.

물론 고난 자체는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 다른 단계로 진입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게 아닐까?

조카와의 불화로 건강이 나빠지고,
때마침 걸린 결핵으로 말미암아,
결국 간 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난것이 1827년.
그의 나이 57세가 되던 해였는데

29일 동안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 무려 2만여 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다녀가며 악성 베토벤의 일생을 마감되었다.

57년...음악가로서는 긴 인생이었지만,
인간의 인생...정말 짧다..


2015년 3월 9일 월요일

Classic travel - Beethoven(2)


Enlightenment and Frace revolution and Beethoven

(계몽주의 사상과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베토벤)




계몽주의는
이성, 즉 ‘자연의 빛을 다방면에 미치도록 하는 것으로
구습()을 타파하고자 하는 18세기에 주로 프랑스, 독일에서 전개된 사상운동이다.
프랑스에서는 정치와 심각하게 접전하는 형태를 취하였지만
정치적으로 후발인 독일에서는 주로 개인의 내면적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의 관점에서 말해야 하는 것은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볼
테르(Voltaire), 루소(Jean-Jacques Rousseau), 디드로(Denis Diderot),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 등이 주도하였던 프랑스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

앞의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각시대별 음악가들은 본인의 시대의 시대상으로 부터 자유로울수 없었다.
베토벤의 경우는 정말 격동의 큰 변화가운데 있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그간 군주 밑에서 무조건 적으로 복종하던 시대를
사람중심의 시대로 바꾼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로크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곧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촉발하게 되고,
유럽사회는 더이상 군주사회가 아닌
평면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탈바꿈하게 된다.

베토벤의 음악상은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음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계몽주의 사상은 독일에서는 인간의 내면의 계발을 중시하는 것이었고
프랑스에서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발현되었다.

당시 독일의 영향아레 있었던 빈은 이러한 인간의 내면을 중시했던 분위기 속에
개인의 감수성을 중요시 했으며,
그에 따라 베토벤의 즉흥적 연주는
듣는이로 하여금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 일화로 프리즈 백작의 집에서
시타이베르트라는 피아니스트와 피아노대결을 벌이던 중
베토벤이 제시한 주제를 시타이베르트가 더 화려하게 전개시키자
베토벤이 시타이베르트의 악보를 거꾸로 놓고
더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음악공부에도 열성적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는 그렇다 치고
하이든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하이든은 이미 너무 오래전 방식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아래
계속하여 새로운 것을 찾았던 베토벤은
식상함을 느끼고 하이든 몰래
다른 음악가들을 찾아 교육을 받았다.



1795년 그는 첫 공개 연주회에 참여하여,
피아노 소나타 2번(Piano concerto no.2, Op 19)과
피아노,바이올린,첼로를 위한 3개의 3중주 작품 1을 선보였다.


A confident musician, Beethoven

당당한 음악가 베토벤




계몽주의 시대상의 영향을 받은 베토벤은
예전시대의 음악가들과 다른 태도를 취했다.
즉, 음악가들은 주로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 나갔는데,
다들 자신의 후원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지극한 '을'의 태도를 취한 반면,
(모차르트는 먹고살기 위해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을의 태도를 취했다)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후원하던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귀족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지냈는데
그들에 대해 항상 당당한 태도를 취하였다.

귀족들의 모임에서 독주회를 열던중
술,담배를 하면서 떠드는 귀족을 향해
큰소리로 "음악을 모독하지 마시오"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리는가 하면,

어느 후작의 집에서 연주를 강요당하자,
집을 박차고 나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백작, 백작이라는 벼슬은 우현히 생긴 것이지만,
나는 내 힘으로 생겼소, 그런데 나에게 명령조로 연주를 강요하다니,
매우 불쾌하오, 백작은 앞으로도 수천명은 나오겠지만,
베토벤은 단 한 명뿐인걸 명심하시오!."

하이든 같은 음악선배들로부터
왜 귀족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느냐 라며 질타를 받았지만,
베토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특히 예술가는 귀족보다 천한 직업이 아니라며 반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