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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0일 화요일

Classic travel - beethoven overcame his ear problem with his passion

베토벤에게 찾아온 가장큰 시련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그의 나이 20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청각장애는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으나, 32세가 될 무렵에는
베토벤 자신 조차도 매우 심각한 병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는 더이상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고,
엄청난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음악밖에 모르는 베토벤에게, 음악을 더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하일리겐슈타트로 내려간 베토벤은 자신의 동생들에게 
유서를 썼다. 하지만 그는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았다.

"가슴 속에 있는 창작의 요구를 다 채우기 전에는 세상을 떠날 수 없었다."
"나는 운명의 끝을 붙잡겠다."
"병이 치유되기만 한다면 나는 온 세계를 담아낼 것이다."

49세 베토벤은 더이상 다른사람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항상 노트를 들고 다니며 글로 적어가며 사람들과 이야기 할 정도였다.
이제 베토벤은 작곡에만 힘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오랜 산책을 통해 그는 스케치북에 악상을 적어내려갔다.

베토벤의 작곡방법을 모차르트와 비교해 보면
정 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모차르트는 한번 작곡할때 절대 수정을 가하지 않았다.
한번 써내려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한곡을 4년씩 썼는데,
엄청난 수정을 가하는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베토벤 교향곡 제 5번 <운명>의 경우
1804년부터 스케치를 시작하여 1808년에야 완성이 되었다.

그는 소리를 들을수 없게 되자
그전에 기울였던 노력에 수백 수천배의 노력을 기울여
악곡들을 완성해 나갔다.

따라서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주옥같은 곡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교향곡 제 5번 (Symphony No.5) (운명)>


<교향곡 제 6번 (Symphony No.6) (전원)>




<피아노 협주곡  제 5번 (Piano concerto No.5) (황제)>




등이 이당시 지어진 곡들이었다.



황제, 전원 등은 베토벤 본인이 붙인 제목이었다.
하지만 교향곡 제 5번의 <운명>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인데,
서두 시작이 마치 운명이 갑작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느낌의 곡이라 후문이다.

제 1장은 갑자기 찾아온 운명
제 2장은 경건한 기도로 마음을 달램
제 3장은 인생에 대한 풍자
제 4장은 운명을 극복한 승자의 환희
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운명 교향곡은 엄격한 고전파의 맥을 유지하는 한편
개인이 지닌 내면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여서
후에 이어지는 낭만파 가도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15년부터 1827년 그의 사망사이 12년간 그는 매우 소수의 작품만을 썼다.
하지만 그 완성도는 이전 그 어느작품보다도 높았다.
그의 인생의 모든 경험이 이 작품들에 녹아들어갔다.


베토벤 교향곡 제 9번 <합창>
Beethoven Symphony No.9




이 곡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힘으로 쓸 수 있었던 가장 완전하고 위대한 곡!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압도적 감동으로 이끄는 교향곡!" 

베토벤의 대표작을 꼽으라고 한다면
교향곡 제 5번 <운명>
교향곡 제 9번 <합창>

이 두가지를 들 수 있겠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한가지는,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온전해 지고
성숙해 지며 완성도가 높아 진다는 점이다.

물론 고난 자체는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 다른 단계로 진입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게 아닐까?

조카와의 불화로 건강이 나빠지고,
때마침 걸린 결핵으로 말미암아,
결국 간 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난것이 1827년.
그의 나이 57세가 되던 해였는데

29일 동안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 무려 2만여 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다녀가며 악성 베토벤의 일생을 마감되었다.

57년...음악가로서는 긴 인생이었지만,
인간의 인생...정말 짧다..


2015년 3월 9일 월요일

Classic travel - Beethoven(2)


Enlightenment and Frace revolution and Beethoven

(계몽주의 사상과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베토벤)




계몽주의는
이성, 즉 ‘자연의 빛을 다방면에 미치도록 하는 것으로
구습()을 타파하고자 하는 18세기에 주로 프랑스, 독일에서 전개된 사상운동이다.
프랑스에서는 정치와 심각하게 접전하는 형태를 취하였지만
정치적으로 후발인 독일에서는 주로 개인의 내면적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의 관점에서 말해야 하는 것은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볼
테르(Voltaire), 루소(Jean-Jacques Rousseau), 디드로(Denis Diderot),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 등이 주도하였던 프랑스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

앞의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각시대별 음악가들은 본인의 시대의 시대상으로 부터 자유로울수 없었다.
베토벤의 경우는 정말 격동의 큰 변화가운데 있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그간 군주 밑에서 무조건 적으로 복종하던 시대를
사람중심의 시대로 바꾼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로크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곧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촉발하게 되고,
유럽사회는 더이상 군주사회가 아닌
평면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탈바꿈하게 된다.

베토벤의 음악상은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음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계몽주의 사상은 독일에서는 인간의 내면의 계발을 중시하는 것이었고
프랑스에서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발현되었다.

당시 독일의 영향아레 있었던 빈은 이러한 인간의 내면을 중시했던 분위기 속에
개인의 감수성을 중요시 했으며,
그에 따라 베토벤의 즉흥적 연주는
듣는이로 하여금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 일화로 프리즈 백작의 집에서
시타이베르트라는 피아니스트와 피아노대결을 벌이던 중
베토벤이 제시한 주제를 시타이베르트가 더 화려하게 전개시키자
베토벤이 시타이베르트의 악보를 거꾸로 놓고
더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음악공부에도 열성적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는 그렇다 치고
하이든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하이든은 이미 너무 오래전 방식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아래
계속하여 새로운 것을 찾았던 베토벤은
식상함을 느끼고 하이든 몰래
다른 음악가들을 찾아 교육을 받았다.



1795년 그는 첫 공개 연주회에 참여하여,
피아노 소나타 2번(Piano concerto no.2, Op 19)과
피아노,바이올린,첼로를 위한 3개의 3중주 작품 1을 선보였다.


A confident musician, Beethoven

당당한 음악가 베토벤




계몽주의 시대상의 영향을 받은 베토벤은
예전시대의 음악가들과 다른 태도를 취했다.
즉, 음악가들은 주로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 나갔는데,
다들 자신의 후원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지극한 '을'의 태도를 취한 반면,
(모차르트는 먹고살기 위해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을의 태도를 취했다)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후원하던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귀족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지냈는데
그들에 대해 항상 당당한 태도를 취하였다.

귀족들의 모임에서 독주회를 열던중
술,담배를 하면서 떠드는 귀족을 향해
큰소리로 "음악을 모독하지 마시오"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리는가 하면,

어느 후작의 집에서 연주를 강요당하자,
집을 박차고 나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백작, 백작이라는 벼슬은 우현히 생긴 것이지만,
나는 내 힘으로 생겼소, 그런데 나에게 명령조로 연주를 강요하다니,
매우 불쾌하오, 백작은 앞으로도 수천명은 나오겠지만,
베토벤은 단 한 명뿐인걸 명심하시오!."

하이든 같은 음악선배들로부터
왜 귀족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느냐 라며 질타를 받았지만,
베토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특히 예술가는 귀족보다 천한 직업이 아니라며 반박하였다.



2015년 3월 8일 일요일

[Classic travel with Mr.Kum nan-sei] - beethoven (1)

음악의 성인 베토벤



베토벤은 흔히 음악의 성인(成人)이라고 불릴정도로 높은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그가 성인이라고 추앙받는 이유는 바로 그가 거쳐왔던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엄청난 음악적 업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의 삶,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인간 승리의 과정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은 것이다.



가혹한 어린시절

베토벤 역시 모차르트나 바흐처럼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쾰른 대주교 선제후의 궁정악단 단원이었고, 아버지 요한은 궁정악단의 테너 가수였다.
할아버지의 지위덕에 베토벤은 처음엔 부유한 편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세살때 할아버지를 여의자 집안형편은 기울기 시작했다.

알콜중독에 빠진 베토벤의 아버지는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는
아들을 통해 돈을 벌 궁리를 하게 되었다.

고작 세살밖에 안된 아들을 방에 가둬놓고 하루종일 피아노만 치게 했다.


짧은 학력, 넘치는 학구열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좋은 스승을 만나,
교육적 부족을 어느정도 채울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였는데
그는 베토벤에게 음악뿐 아니라 많은 교양을 가르쳤다.

학교를 그만둔 베토벤은 궁정예배당에 들어가 네페의 보조 연주가가 되었으며
2년만에 정식 연주자가 되었다.

5년뒤 베토벤은 빈에 가서 모차르트를 만났는데,
그때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젊은이를 잘보게 나중에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 걸세" 라고..

모차르트를 만난 즐거움도 잠시..
어머니의 병세 악화로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결국 어머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별세로, 아버지의 알콜 중독증은 더욱더 심해졌다.
17세의 베토벤은 소년가장 베토벤이 되었다.
어른구실 못하는 아버지와 그의 동생들을 돌보느라
베토벤은 제대로 된 교육도 못받은 상태로 일만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베토벤은 학식과 교양의 부족이라는 컴플랙스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베토벤 자체가 지적 호기심과 욕구가 강했으므로,
그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으며,
다행히 그의 유명한 즉흥연주가 알려지면서,
본의 명문가 폰 브로이닝 백작가를 드나들게 되므로,
거기사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문학, 철학, 역사 등 다방면에서의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유럽을 뒤흔든 프랑스 대학명과 계몽주의 사상에 대한 이해는



그의 음악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