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5일 금요일

바그너에 대하여 - 4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다)

바그너의 평안한 말년


조국 독일에서의 도피, 그리고 긴 망명생활로
바그너는 5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대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루트비히 2세>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축조한 장본인으로 정치보다 예술이나 문화쪽에 관심이 많았던 왕이었다. 물론 그로인해 국고를 탕진하여 대신들로 부터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혀 살해당하는 최후를 맞이 했지만 말이다. 어쨋든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다. 때문에 그는 돌아온 바그너를 극진히 대접하고 뮌헨과 루체른 교외에 집을 제공하고 작곡료를 주는 등 마음껏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다.

덕분에 바그너는 <니벨룽겐의 반지>에 몰입하고, <트리스타과 이졸데>를 공연할 수 있었다. 
또,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짓고 <니벨룽겐의 반지>를 첫작품으로 상영하였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이곳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바그너가 직접 설계에 참여하였다고 하니 가히, 종합예술을 지론으로 삼은 음악가답다. 바그너 음악축제는 오스트리아 잘츠뷰르크의 모차르트 음악축제,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축제와 함께 유럽의 3대 음악제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명성이 높다고 하는데, 독일 여행을 갈 일이 생기면 꼭 한번 들러보길 권한다. 하지만 워낙에 명성이 높아 페스티벌 암표구하기도 하늘의 별따리라고 한다.

이 극장내에는 에어컨 시설이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에어컨 등의 공조설비가 음악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평상복(반바지 등)을 입고 연주를 하고 공연을 보는사람들도 보는 중에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라고 한다. 가끔식 노인들 중에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주요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다.

<니벨룽겐의 반지> 전곡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바그너의 말년을 마무리 짓는다면,
최후의 저술인 <종교와 예술>, 최종 작품인 <파르지팔>을 공연하고 70세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후, 부인 코지마와 그의 장남 지크프리트, 손자 빌란트 등에 의해 바이로이트 음악제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탄호이저>


바그너와 탄호이저

바그너는 야심가이자 남성적이고 통이 큰 사람이었다. 그의 '종합예술적'지론은 그로 하여금 단순히 음악만 만드는것에 만족하지 않고 문학, 신화, 연극 등 예술의 모든 영역을 통합하고 '악극'이라는 이름을 붙여 대형화된 공연을 시연하였다. 짧은건 4~5시간, 긴것은 며칠을 공연해야 끝이 나는 엄청난 길이와 기존오페라와 규모자체가 다른 큰 스케일의 무대, 마치 기존 영화관에서 아이맥스영화관을 보는 충격과 감동을 관객들에게 선사하였다. 

그중 탄호이저는 그의 초기작품으로 기존대비 증가된 관현악단, 웅장한 무대배경등을 선보인다. 극의 내용만을 보더라도 기존의 개인적 감정, 사랑이나 미움, 배반등을 주로 다루었던 것과 반해 <탄호이저>는 신화나 전설, 종교적 내용등을 다루었다고 보면 된다. 즉, 로마신화의 비너스 여신의 등장과 탄호이저의 에 대한 유혹, 신앙심 깊은 탄호이저의 약혼녀가 탄호이저를 구원함,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바그너의 후기작품으로 넘어갈수록, 연주하기가 점점 힘들어질 정도로 많은 체력을 요구하게 되는데, 실제로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대부분 씨름 선수와 같은 거구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정도로 바그너의 작품은 대형화, 웅장화, 장편화 되어 가는것이 특징이다. 

바그너, 
그는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종합예술가로써
많은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고, 음악에 대한 또하나의 가능성을
실현시킨 위인이 아닌가 싶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