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5일 월요일

한국은행, 기준금리 전격인하, 사상 첫 1.5%대 금리...내집마련에 영향은?

 

<이미지출처 : biz.chosun.com>



내집 마련하시는 분들에게 또 한번의 희소식..


금일자로 한국은행이 기준듬리를 추가로 인하했네요..


부진한 경기회복세에 메르스가 큰 변수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금일 오전 본 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내린 1.5%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8월과, 10월 2015년 3월 등 3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총 0.75%포인트나 내려


사상 최저 기준금리 시대를 열었었는데요,


이후 금리인하 효과를 지켜보기 위해 2개월 연속 금리동결이 이뤄지다, 다시 금리를 내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결국 기존 금리인하 효과가 충분치 않았다는 결론인데,


 부진한 경기지표만 보더라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소비부분에서 미미한 회복조짐은 있었지만, 그리 괄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최근 수출과 생산, 고용 등의 지표역시 활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영향은 메르스인데,


메르스 확산에 따른 불안심리가 장기화 된다면


가뜩이나 떨어져있던 소비심리를 심하게 위축하게 되어


장기 불황을 초래할 수 있지 않겠냐는 분위기 인듯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결국 장기 내수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면 심각한 것이겠죠.



어쨋든, 하지만 내집마련하신 분들에겐 단기적으로나마,


대출금리 인하에 따른 부담감소가 있을 테니


희소식이 아닐까 합니다만,



약간 우려스러운점은,


하반기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금리인상을 할 것으로 보여


다수의 내집마련하신 분들에게


가계부체 증가로 부담을 줄 수 있는 소지도 있다는 거..





2015년 6월 12일 금요일

[차이코프스키] - 러시아 음악을 세계로 이끌다


차이코프스키 - 러시아 음악의 세계화


결혼의 실패로 큰 충격을 받아 이리저리 방황하던 차이코프스키, 그는 187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다. 경제적으로는 폰 메크부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정신적인 고통도 어느정도 극복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시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작곡된 곡이 바이올린 협주곡, 오페라<오를레앙의 소녀>,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G장조, 장엄서곡(Overture)<1812년>등이다.


<장엄하게 시작하는 차이코프스키의 잘 알려진 곡중 하나인 피아노협주곡 1번>


<'노다메칸타빌레 인 유럽'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차이코프스키 Overture 1812>

1887년 부터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에만 머물지 않고 유럽과 미국등 여러 나라에서 자신의 곡을 직접 지휘하면서 자신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또 대부분 좋은 평을 받았다. 그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고전 음악만을 높게 평가해 온 사람들에게 러시아 음악은 신선한 것이었고 러시아 음악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보여준 러시아 음악은 서유럽의 클래식음악에 결코 뒤처질 뿐만 아니라, 러시아 특유의 정서와 감성마저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실 러시아의 음악은 황무지나 다름 없었다. 서유럽의 경우 이미 오래전부터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등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에 의해 클래식 음악의 기초가 탄탄하게 잡혀진 상태에서 18세기 후반 다양한 개성을 갖춘 음악가들이 이 음악적 형식의 기초위에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음악을 펼친 반면, 러시아는 차이코프스키가 그러한 기초를 세움과 동시에 러시아적 향미까지 첨가하여야 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차이코프스키는 형식적인 고전음악에 충실했던 그의 스승 루빈스타인의 영향을 받아 이런 기본적 고전형식을 충실이 지켜냈고, 이것이 바로 러시아음악이 세계적인 무대에서 조명을 받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훗날 일각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지나치게 서유럽중심의 음악에 치중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으나, 그것은 이제 먹을만큼 배불러진 상태가 되니 비로소 할 수 있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차이코프스키가 서유럽의 음악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러시아는 아직도 음악적 불모지에서 돌이나 캐고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차이코프스키는 어릴적 러시아 민요의 주 무대였던 광산지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러시아 민속적 음악요소가 몸에 배여 있었고, 러시아 음악이 세계로 흘러나갈때 이러한 민요적 요소까지 녹여서 흘려 보냈다. 이처럼 서양 음악의 고유한 세련미와 러시아 민요적 정서가 녹아든 그의 음악은 유럽을 비롯한 외국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일수 밖에 없었다. 

1891년 미국 순회 공연중 뉴욕 카네기 홀 연주회는 차이코프스키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2015년 6월 9일 화요일

차이코프스키에 대하여 -2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는 깊은 애수와 어두운 분위기가 깃들어 있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그의 성격과 연관이 있다. 그는 어릴때부터 유별나게 감수성이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다. 한 일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감수성이 기민했었는지 알 수 있다. 어느날 차이코프스키의 집에서 아마추어 실내악이 연주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린 차이코프스키가 사라진 것이었다. 유모가 2층에 가보니 차이코프스키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고 한다.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시어 조금 전에 제 귀를 통해 머릿속으로 들어간 그 음악을 도로 내쫓아 주십시오"...조금은 손이 오그라드는 대목이다.

이처럼 기민한 성격은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스스로가 엄격한 태도를 지녔는데, 한곡이 완성되는데 엄청나게 오랜 세월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거의 한번쓰면 절대 수정을 하지 않았던 모차르트와는 정 반대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 작곡한 곡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번에 폐기해 버릴 정도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비단 작품뿐 아니라 그의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다지 좋지 않은 방향으로 였다. 1868년 자신의 음악을 인정해 주던 벨기에 출신 여자가수인 데지레 아르토와 사랑에 빠져 약혼하기에 이르렀지만, 주변의 반대에 맞닥드린다. 이때 차이코프스키의 우유부단하고 예민한 성격이 한몫을 하여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자, 아토르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리고 만다. 

또 37세에 그보다 9살 연하인 그의 제자 안토니나 미류코바의 열렬한 구애를 받게 되어 마지못해 결혼을 하게 되지만,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지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던 차이코프스키는 결혼후 거의 아내를 돌보지 않고 음악에만 전념해 버린다. 이로인해, 곧 결혼생활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이러한 태도를 아내가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서는 스스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고 마침내 아내를 버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도주해 버린다.



후원자 메크부인으로 인해 찾은 안정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 메크부인>

1876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일하고 있을때 차이코프스키는 파리에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보고 큰 감동을 받고 귀국하자마자 그의 주옥과도 같은 발레 음악인 <백조의 호수>를 작곡하게 된다. 볼쇼이극장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백조의 호수>는 훗날 크게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대작 발레곡 백조의 호수>

차이코프스키의 생계의 걱정을 덜어준 후원자 메크부인과의 만남으로 차이코프스키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작곡에만 전념할수 있게 된다. 철도 경영자의 미망인이었던 폰 메크 부인은 그의 음악을 경외하며 그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처음에는 악보 출판비를 대주고, 빚을 갚도록 돈을 빌려주다가 1877년부터는 1년에 6천 루블씩 지원해 주었다. 메크부인도 대단했던게, 평생 그렇게 차이코프스키를 지원해 주고도, 정작 본인은 우연히 마주친 일을 제외하고는 차이코프스키를 개인적으로 한번도 만난적이 없다고 한다.


2015년 6월 7일 일요일

차이코프스키에 대하여 -1 (출생에서 작곡가까지)

광산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다

<차이코프스키 가족사진>
제일 왼쪽이 차이코프스키

1840년 5월 우랄 지방의 외딴 시골마을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난 차이코프시키는  광산 기술관리였던 일리야 케트로비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기 보다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면서 지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는 프랑스 혈통의 여자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를 정도로 어느정도 음악에 식견이 있었고 어린 차이코프스키는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에 프랑스 가정교사에게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어릴적부터 깜짝 놀랄만한 재능을 선보이긴 했지만, 부모들은 그의 재능을 애써 외면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차이코프스키가 안정된 직장에서 안정된 삶을 꾸리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0살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가면서 음악교육은 멈춰지고 말았다. 

상크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코프스키는 법률학교에서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식지 않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알아챈 아버지는 뒤늦게 차이코프스키가 독일인 피아노 선생에게 레슨을 받도록 해 주었다. 차이코프스키가 19세가 되었을때 그는 학교를 졸어바고 법무부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적성에 맞지 않는 길이라, 그는 음악을 더 공부하기 위해 러시아 음악협회가 운영하는 음악교실에 들어갔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내려놓고, 완전한 음악가의 길로...

음악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그의 음악적 열망은 불같이 달아올랐다. 결국 그는 음악을 위해 그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만다. 당시 그의 음악교실 스승은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였다. 그는 서유럽 음악을 러시아에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고, 차이코프시키는 이러한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

차이코프스키의 첫 관현악 작품은 <폭풍우>라는 곡이었는데, 이는 스승 루빈스타인의 분노를 샀다. 왜냐하면 튜바, 하프, 잉글리스 호른을 사용하였다는게 이유였다. 이는 새로운 음악을 따라는 것이었고, 루빈스타인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폭풍우, 차이코프스키>

1866년 우수한 성적으로 음악원을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모스카바로 갔다. 루빈스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가 세운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근무하기 위해서 였다. 이때 부터 11년간 차이코프스키는 교수아자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또 그는 <러시아 소식>지에 글을 싣는 음악평론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모스크바생활 2년뒤, 그는 최초의 대작인 <교향곡 1번>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둔다.

<교향곡 1번,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불과 몇년후 그의 스승인 루빈스타인을 뛰어넘는다는 평을 받은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를 발표하게 된다. 이 협주곡은 독일의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눈에 들어 유럽 각지에서 연주되고 그에 따라 차이코프스키는 명성을 떨치게 된다.

<피아노협주곡 1번,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정말 유명하다..

2015년 6월 6일 토요일

러시아 음악에 대하여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의 불모지 러시아?

러시아의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사실 18세기 후반까지 러시아는 음악의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음악자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듯 하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등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고전주의를 넘어서 각각의 개성을 살린 낭만주의로의 음악적 분화까지 일어나고 있던 터에, 러시아에서는 고전주의 음악자체조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러시아 음악계의 사정은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바뀌게 된다. 중요한것은 단순히 서유럽의 음악을 그대로 따라하는가, 아니면 러시아적 정서를 잘 녹여서 반영하는가 인데, 다행히도 차이코프스키는 후자에 해당한다. 러시아 고유의 느낌을 가미한 세련된 서유럽의 전통적 음악을 창조한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음악이 세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다.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에 서양음악을 들여온 사람이라면, 러시아 고유의 민족적 음악을 고수한 5명이 있었는데, 무소르크스키, 발라키레프, 림스키-코르사코프, 큐이, 보로딘이 그들이었다.

러시아의 고유의 음악을 강조한 이들 5인은 당연히 차이코프스키를 비난했다. 하지만, 워낙에 차이코프스키가 서유럽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유명해 졌기 떄문에, 사실 오늘날에 와서도 러시아음악 하면 1번으로 떠올리게 되는것이 바로 차이코프스키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자랑이자 러시아를 대표하는 국민 음악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6월 5일 금요일

바그너에 대하여 - 4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다)

바그너의 평안한 말년


조국 독일에서의 도피, 그리고 긴 망명생활로
바그너는 5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대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루트비히 2세>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축조한 장본인으로 정치보다 예술이나 문화쪽에 관심이 많았던 왕이었다. 물론 그로인해 국고를 탕진하여 대신들로 부터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혀 살해당하는 최후를 맞이 했지만 말이다. 어쨋든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다. 때문에 그는 돌아온 바그너를 극진히 대접하고 뮌헨과 루체른 교외에 집을 제공하고 작곡료를 주는 등 마음껏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다.

덕분에 바그너는 <니벨룽겐의 반지>에 몰입하고, <트리스타과 이졸데>를 공연할 수 있었다. 
또,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짓고 <니벨룽겐의 반지>를 첫작품으로 상영하였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이곳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바그너가 직접 설계에 참여하였다고 하니 가히, 종합예술을 지론으로 삼은 음악가답다. 바그너 음악축제는 오스트리아 잘츠뷰르크의 모차르트 음악축제,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축제와 함께 유럽의 3대 음악제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명성이 높다고 하는데, 독일 여행을 갈 일이 생기면 꼭 한번 들러보길 권한다. 하지만 워낙에 명성이 높아 페스티벌 암표구하기도 하늘의 별따리라고 한다.

이 극장내에는 에어컨 시설이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에어컨 등의 공조설비가 음악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평상복(반바지 등)을 입고 연주를 하고 공연을 보는사람들도 보는 중에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라고 한다. 가끔식 노인들 중에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주요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다.

<니벨룽겐의 반지> 전곡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바그너의 말년을 마무리 짓는다면,
최후의 저술인 <종교와 예술>, 최종 작품인 <파르지팔>을 공연하고 70세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후, 부인 코지마와 그의 장남 지크프리트, 손자 빌란트 등에 의해 바이로이트 음악제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탄호이저>


바그너와 탄호이저

바그너는 야심가이자 남성적이고 통이 큰 사람이었다. 그의 '종합예술적'지론은 그로 하여금 단순히 음악만 만드는것에 만족하지 않고 문학, 신화, 연극 등 예술의 모든 영역을 통합하고 '악극'이라는 이름을 붙여 대형화된 공연을 시연하였다. 짧은건 4~5시간, 긴것은 며칠을 공연해야 끝이 나는 엄청난 길이와 기존오페라와 규모자체가 다른 큰 스케일의 무대, 마치 기존 영화관에서 아이맥스영화관을 보는 충격과 감동을 관객들에게 선사하였다. 

그중 탄호이저는 그의 초기작품으로 기존대비 증가된 관현악단, 웅장한 무대배경등을 선보인다. 극의 내용만을 보더라도 기존의 개인적 감정, 사랑이나 미움, 배반등을 주로 다루었던 것과 반해 <탄호이저>는 신화나 전설, 종교적 내용등을 다루었다고 보면 된다. 즉, 로마신화의 비너스 여신의 등장과 탄호이저의 에 대한 유혹, 신앙심 깊은 탄호이저의 약혼녀가 탄호이저를 구원함,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바그너의 후기작품으로 넘어갈수록, 연주하기가 점점 힘들어질 정도로 많은 체력을 요구하게 되는데, 실제로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대부분 씨름 선수와 같은 거구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정도로 바그너의 작품은 대형화, 웅장화, 장편화 되어 가는것이 특징이다. 

바그너, 
그는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종합예술가로써
많은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고, 음악에 대한 또하나의 가능성을
실현시킨 위인이 아닌가 싶다.

2015년 6월 4일 목요일

메르스확진판정 환자 KBS 단독인터뷰 보도


얼마전 KBS에서 방영된 영상에서
국내 질병관리본부가 얼마나 무능하고
안일하게 전염병을 대처하는지
보여주는 충격적인 영상이 공개되었다.

처음엔 메르스 증상 환자들과 같은 병실에 있다가
결국 메르스 확진 판정받은 환자와의 인터뷰
<KBS 단독인터뷰>





































디자인트랜드 세미나 2016-2017 경향을 말하다!! (TRENDLAB KOREA)

프랑스의 디자인트랜드 회사인 TRENDLAB의 한국지사TRENDLAB KOREA주관
디자인트랜드 세미나를 듣는 기회를 가졌다.

여느 자재세미나때보다 풍부하고 개연성 넘치는 발표자료로 한시간 여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다.
지난번 KCC  디자인트랜드 세미나때도 좋다고 느꼈었는데,
뭐랄까..과거의 디자인 트랜드를 10년단위로 특징을 뽑고
그 특징으로 주기를 만들어서, 내년과 내 후년인 2016, 2017년의 디자인 트랜드를
예상하고 그 트랜드에 따른 각각의 상품들을 유추해 내는 방식이었다.

발표자에 따르면, 2000~2010년까지는 FAST
2010~2020년까지는 SLOW 트랜드라고 한다.

즉 개인적이고, 빠르게 뭔가를 만들어 내는 트랜드가 과거의 10년이었다면,
지금의 10년은 함께, 그리고 천천히 의 개념이 곁들여져 있으며,
이 논리에 따라 모든 다지인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TRENDLAB KOREA 에서 발표한 2016년~2017년 디자인 경향 예측>

사실 이 회사는 이런 디자인 경향만 예측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발표자료 자체만 해도 거의 200장이 훨씬 넘어가는 분량의 발표자료, 특히 각 발표자료는 각 장마다 엄청난 퀄리티의 이미지와 내용들을 담고 있었는데, 10명이 1년동안 이 작업만 하였다고 하니 사실 연봉 5000만원짜리 직원 10명이라고만 쳐도 5억짜리 발표자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래서 어쨋든 회사의 지적자산이다 보니, 자세한 사진을 일일이 올릴 수는 없다는 점 양해 바란다.

어쨋든 위 사진은 발표의 맨 마지막장으로 모든 발표를 요약하는 장이다. 주요 키워드는, 

<거칠고 자연을 동경하는 광물지향족> 
<기존의 것들을 융합시킨 컬러풀한 자유족> 
<최첨단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성의 테크노족> 
<황금색의 고전적 노블족> 으로 나누었다. 

아무래도 저작권 문제도 있고 하다보니, 각각의 대표적인 슬라이드 하나씩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황금색을 사랑하는 고전파 노블족>

새로운것을 지향하지만, 고전을 재해석하고 고급스런 황금색을 동경하는 새로운 귀족인 노블족의 트랜드.
요즘 한창 유행하는 허니시리즈또한 이 트랜드에 포함되어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미네랄 족의 트랜드>

점점더 자연을 동경하고, 빛나는 광물이나, 자연그대로 혹은 우주로의 동경을 원하는 미네랄 족의 트랜드는 미술, 건축, 인테리어, 제품디자인, 패션 등 모든 분야의 디자인 트랜드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한다. 

<자유를 동경하는 컬러풀한 히피족>

기존의 질서와 색등을 짜집기 하여 자유로움을 동경하고 비주류를 주류로 변모시키는 등의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기존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동경하는 디자인 트랜드.

 <최첨단의 기술력과 혼자가 아닌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를 좋아하는 스피드족>

스마트한 기기들을 사용해 나가고, 더이상 혼자가 아닌 
집단지성을 활용할 줄 알며 또한 재빠르고 엄청난 스피드를 좋아하는 디자인 트랜드 경향.

이상 네가지 디자인 트랜드가 앞으로 다가올 2년간의 디자인 트랜드라고 보면 된다고 한다.
각각의 페이지마다 실제 유행의 가능성이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훨씬 개연성이 느껴지는 발표였다.

꾀나 관심이 가는 분야이고, 단순히 현상관찰뿐 아니라,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던것 같다.



마지막으로 발표를 하셨던 ***이사님께서 웃으며 명함을 주셨다.
덕분에 발표 잘 들었고 수고많으셨습니다~